스페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버벅거렸던 '나'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려요.
그러면 울음을 삼킬 수 있거든요.
'나는 강물처럼 말한다.'
나는 말하기 싫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려요.
그러면 말할 수 있어요.
'나는 강물처럼 말한다.' (조던 스콧, 2020)
조던 스콧의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에서 주인공 '나'는 정말 강물처럼 말한다.
어릴 적, 말을 더듬어서 수업 시간에 말을 하기 어려웠던 '나'. 그래서 발표 시간이 가장 두려웠던 '나'의 마음에는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고, 부딪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아빠와 함께 단둘이 있으면 안도감이 들지만, 아직 마음 한 켠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해 입술이 뒤틀리고, 나를 향해 키득거리고 비웃는 '눈'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그러다 보면, 뱃속에 폭풍이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 두 눈에 빗물이 가득 차오른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나'의 아버지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여주면서 내가 저 강물처럼 말한다고 그랬다.
강을 보며, 말을 더듬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빠른 물살 너머에는 잔잔한 강물과, 부드럽게 일렁이며 반짝거리는 물결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강물처럼 말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침내, 학교 발표 시간에 가장 좋아하는 곳인 '그 강'에 대해 강물처럼 말할 수 있게 된다.
집을 떠나 어디론가 여행하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 된다. 언어가 다르거나, 기후가 다르거나, 먹는 음식이 달라지기만 해도, 모든 게 낯설다.
외국으로 떠난 이주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다양한 이유로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터전을 옮긴 이주자들에게 뭐든지 낯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언어가 다르면 그 어려움은 배가 된다. 가장 시급한 문제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걸음마를 떼듯, 천천히, 버벅거리며 외국어를 배우고 익힌다. 같은 언어(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에도 스페인어의 ‘다름’은 분명히 존재한다. 수많은 단어, 억양, 표현들… '나'의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익숙한 우리들은 무언가 조금만 달라도 '다름'을 인식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다. 불편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다음 선택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 ‘다름’을 또 다른 가능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름’을 틀림으로 볼 것인가?
스페인에 살면서, 스페인 친구를 사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나'때문에 조별 숙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적도 있었고, '나' 때문에 선생님께서 여러 번 설명을 반복했던 적도 많았다. 그래서, 스페인 친구들을 사귀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어가 부족했던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친구들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특히, 베네수엘라 출신이며, 같은 반 친구였던 마리아가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구사하는 '나'의 스페인어를 감쪽 같이 알아듣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적이 많았는데, 그녀는 나의 말을 정말 잘 이해했다. 생각해 보면, 마리아의 능력은 부족한 나의 언어능력을 집중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의 본연의 고유성에 집중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리아처럼 하지 못했다. 스페인어가 그리 유창하지도 않았던 '나'는 본토 스페인어 발음이 아니면,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누군가가 말하는 스페인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나의 능력은 인간 본연의 고유성에 집중하는 게 아닌 ‘언어의 능력’에 집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언어, 제대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존재할까? 한국인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듯, 스페인 사람들도 스페인어를 정확하게 구사하기 어렵다. 그런데 나는 그 언어능력에 목을 매고, 스페인어가 유창하지 못한 '나'를 괴롭히고, 스페인식 스페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히 여겼으니,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2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지금, 돌이켜 보면 베네수엘라 출신 나의 친구, 마리아에게 두고두고 고마울 뿐이다. 마리아가 없었더라면 '나'의 학교 생활은 너무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에서 '나'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에서 스페인어를 버벅 거렸던 '나'의 이야기 이기도 하고,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내가 저희들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만 귀를 기울여요. 아이들은 내 얼굴이 얼마나 이상해지는지만 봐요. 내가 얼마나 겁을 먹는지만 봐요.”
(조던 스콧, 2020)
스페인에서의 '나'는 그림책의 '나'였고, 한국에서의 '나'는 그림책의 '아이들'이었다.
그림책을 넘기다 보면, 주인공 '나'는 이제 자주 강물을 만나러 간다. 그러면 어느새, 양면 페이지로 제작된 '나'의 얼굴이 양면으로 열린다. 드넓고 반짝거리는 강물에서의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강물이 너무 반짝거려 눈이 부시다. 마치 주인공인 '나'의 눈물이 강 빛으로 바뀐 것 같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너는 강물처럼 말한다'라고 했던 그림책 주인공의 아버지.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너는 강물처럼 말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말'이 아닌, 본연의 '고유성'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까?
말을 더듬는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요. 단순히 말을 더듬는다고 말해 버리기 힘든 면이 있어요. 단어와 소리와 몸을 가지고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노동을 하는 셈이거든요. 내가 말을 더듬는 것은 나만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날 유창하게 말하지 못한 여러 입이 만들어 낸 거대한 흐름의 일부이기도 해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날씨 이야기를 가볍게 주고받거나,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을 건네는 그런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진 흐름 말이에요. 말을 더듬으면서 나는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철저히 혼자라고 느끼기도 해요. 말을 더듬는 건 두려움이 따르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일이에요. 물론 나도 가끔은 아무 걱정 없이 말하고 싶어요. 우아하게, 세련되게, 당신이 유창하다고 느끼는 그런 방식으로요. 그러나 그건 내가 아니에요.” (조던 스콧,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