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크루스, 멕시코
유럽의 근대문명이 라틴아메리카의 신비로운 고대문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예술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서구의 이성과 논리를 거부하여 이를 뒤트는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아메리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마치 이들을 비이성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나는 다른언어로 꿈을 꾼다'라는 이 영화는 마술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작품인데, 마르케스의 100년의 고독이 주는 마술적 사실주의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면서도, 이 영화만이 주는 또 다른 마술적 사실주의의 힘이 있다. 바로 언어이다.
시크릴어?
언어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마을의 이름, 전통, 관습, 애정, 신화 등이 될 수 있다. 언어가 없으면 모든 것은 혼돈이고 망각이다. 언어가 기억되지 못하고, 그 기억이 전달 되지 못하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시크릴 언어를 연구하고 녹음하기 위해 베라크루스의 작은 한 마을을 찾은 언어학자 마르틴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멸종되어 가는 고대의 언어가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에 의해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말이다.
마르틴의 미션은 시크릴언어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의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질 않는다. 게다가 그들의 갈등은 말 할 수 없는 비밀로 가득하다. 오랜 시간, 이 두사람이 대화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서 였을까? '죄'라는 두려움이 서로 대화할 수 없도록 언어를 봉인 해 버렸다.
시크릴어가 어떤 언어인지 궁금했다. 콘트레라스 감독은 시크릴어라는 가상의 언어를 창조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었다. 시크릴어를 사용하는 3명의 생존자 중 한명 이였던 하신타 할머니는 이 언어의 기원을 영화 초반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태초에 여자는 새였어. 땅을 걷는 최초의 남자를 그 새는 사랑하게 됐지. 남자도 새를 사랑했어.하지만 쓰는 언어가 다르다 보니 맺어지기가 어려웠지. 그래서 새는 남자에게 밀림 속 만물의 공용어인 우리의 시크릴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어. 둘의 결합으로 태어난 게 인간이야. 그때부터 세상에 번성한 인간과 동물은 모두 시크릴어를 쓰게 됐지."
라틴아메리카,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
라틴아메리카로 건너간 스페인인들은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했다.
태어난 땅과 함께 만들어진 언어를 파괴하는 것은 완전한 원주민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였다. 평등하고 평화로웠던 언어와 감성과 본능은 말살되고 이성과 스페인어만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마르틴은 시크릴언어를 채집한다. 시크릴 언어를 채집하면서, 동시에 유비아(lluvia)는 영어로 라디오 방송을 한다. 정복자들의 언어와 시크릴 언어가 함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으로 공존한다.
마르틴은 유비아에게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를 설득하고 갈등을 해소하여 시크릴 언어를 채집해야 한다고 그녀를 설득한다. 하지만,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는 대화를 통한 개인적 전쟁을 치룬다. 이는 민족 정체성의 위협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는 라틴아메리카의 열악한 상황, 공동체의 붕괘, 언어의 멸종, 세계관에 대한 포기에 대한 분노이다.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
이사우로는 홀로 남았다.
스페인어를 못하는 이사우로는 홀로 남았다. 정복자들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문명을 상징했기에, 문명을 받아드리지 못한 이사우로는 도태되었다. 그러나 한 때는 이사우로도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교회에 나가 스페인어를 배웠지만 이를 방해한 것은 에바리스토였다. 스페인어는 인간을 분열시켰다.
이사우로가 이해하기 어려운 스페인어로 에바리스토와 마리아는 서로 사랑하며, 이사우로를 떠났다.
라틴아메리카의 문명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예수상을 보고 에바리스토는 동성인 이사우로를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여긴다. 금기의 사랑이 없었던 시크릴 문화에서 그리스도교 앞에서 그들의 사랑은 부끄러움과 고통이 되었다. 정복자들의 무기를 지닌 에바리스토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사우로를 위협했고, 마을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자신이 동성을 사랑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시크릴 낙원과 언어는 파괴되고 사랑은 버려졌다. 라틴아메리카가 파괴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굴까?
이 영화의 주인공에 대해 내내 고민 해 보았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에바리스토, 이사우로, 마르틴도 아닌 Veracruz의 정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원주민들의 현실과 존재가 위협받으며, 정체성의 뿌리가 뽑혀 나갈 지경인 상황에서 그 누구도 Veracruz를 위로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의 문명은 자연을 위로할 수 없다. 이 영화 감독은 "모두가 다르게 말하듯, 삶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도 모두 다르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 "나는 다른언어로 꿈을 꾼다"는 멕시코의 복잡한 세계이고 라틴아메리카의 또 다른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