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루아워>를 보고 나서
자가격리에서 해제된지 나흘(4일)째이다. 장마기간이라 우산을 챙기고 카페와 영화관이 추울 것 같아서 가디건을 입었다. 온갖 건물과 간판이 시야를 가리는 흐린 서울은 무척 칙칙하다. 엘리베이터에 마스크를 끼고 올라탄 사람들은 찰나를 못 견디고 닫힘 버튼을 누른다. 어찌나 자주 눌렸는지 버튼 위에 붙은 흰색 막에는 닫힘 아이콘이 새겨져 울퉁불퉁하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내가 잡고 싶었던 감정의 실마리를 건져올린다. 힐링하려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블루아워>를 보고 찝찝해할지도 모른다. 난 비위가 강해선지 진짜로 역겨운 인간이 내뱉는 역겹다는 말에도 눈 하나 깜짝 안했다. 그보다 내게 <블루아워>는, 그저 밀치고 뭉개버렸던 나의 감회를, 되돌아온 서울이 얼마나 짜증나고 답답한 곳이었던가를 짚어 돌아보게 했다. 일년만에 다시 마주한 가족들과 집은 변한 게 없으면서도 낯설고...
누구나 자기 안에 기요(심은경)와 스나다(카호)를 지니고 있다. 낙천적이며 명랑한 모습과 염세적이고 신경질적인 모습 말이다. 나는 지난 이주 간 기요처럼 가족들 앞에서 조금은 억지로 웃고 있었다, 왜냐, 어차피 잠깐 있다 갈 건데 좋은 게 좋은 거다. 방 안으로 가족들이 먹을 걸 가져다주면 소리를 지르며 애처럼 환호했지만 내심 격리를 위해 둘러쳐놓은 뽁뽁이 너머로 그들의 얼굴을 보지도 않아도 됨에 안심했다.
그렇게 오고 싶었던 서울이지만 막상 와보니 어쩐지 너무 익숙한 게 찝찝해서, 미처 긁어내지 못한 신발 바닥의 껌자국을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내 방은 그대로지만 버리지 않은 온갖 책과 잡동사니가 쌓여있어서 너저분하다. 화장실은 씻고 나면 바닥에 물이 가득 차서 빠지는데 꽤 걸린다.
여기 와서 정말 잘 먹고 있다. 작년엔 북미 시골의 어느 캠퍼스 타운에서 혼자 끼니를 챙겨먹으려니 변변찮아서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이렇게 구질구질해야 할까"하고 울화통이 터졌었다. 없는 돈에 꾸역꾸역 뉴욕여행까지 갔다와서는 더 서러웠다. 그리고 한달쯤 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나는 그렇게 주저앉은 김에 푹 쉬고 다시 일어서면서 진짜 "자기챙김"을 시작했다. 사람을 부러 안 만나도 되니 좋았다. 쓰고 싶던 소설에도 손을 댔다.
폐경이 가까워 몸에 열이 많이 나고 이제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엄마는 여전히 거울 앞에서 자기 입은 옷이 촌닭같거나 뚱뚱해보이지 않느냐고 몇번을 묻고 제발 브래지어를 하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하고 너 살쪘지, 하며 킬킬댄다. 외가와 얽혀 있는 자질구레한 일들로 한탄을 늘어놓던 엄마는 가만보면 남동생이 외삼촌을 꼭 닮았더라며 치를 떨었다. 이유는 둘 다 카카오톡에 답을 안한다는 거다. 나는 얼마 전 엄마에게, 말보다는 행동이 그 사람 마음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했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도 행동이지만.
같이 칼국수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일갈했다. 내가 네 시녀 노릇을 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움찔했다. 격리 때문이지. 아냐 이 전에도 그랬어. 맞아, 그래서 미안하고 고맙다. 나는 집안일을 잘 못하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엄마도 밥을 하지 말고 사먹으면서 아무도 돌보지 않고 엄마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아빠가 무모한 투자로 돈을 날려먹으니 그 사람 은퇴 후가 겁이 난단 엄마에게 노후대비는 이혼준비라고 대꾸했지만, 결국 엄마의 삶은 엄마가 챙길 것이다. 엄마는 엄마가 있어야만 돌아가는 세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일궈온 것들이 모조리 허울뿐이라고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그런 말을 엄마에게 할 수는 없다. 엄마는 노력했고 어떤 것도 엄마의 잘못이 아니다.
여전히 한국은 시끄럽다. 공항에서부터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가해와 자살소식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더랬다. 다만 집에 오니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막장 드라마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유튜브 비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중년 남자의 우스갯소리에 맞장구를 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이제는 엄마가 무엇을 그리 웃겨하는지 나는 귓동냥도 할 수 없고, 그걸 내게 보여주더라도 난 아마 웃을 수 없을 것이며 솔직히는 보고 싶지 않기도 하다. 엄마를 마지막 주자로 각자가 자기만의 방에 들어앉는 소외가 시작된 듯하다. 우리도 한때는 다같이 모여앉아 개그콘서트를 보던 주말이 있었다. 언제부터 흩어지기 시작했을까. 그런 거 보는 애들은 다 머리통을 총으로 쏴서 날려버려야 한다며 늦은 밤 드라마를 보려고 앉아있던 남매에게 아빠가 살벌한 으름장을 놓던 때부터? 아니면 언제나 엉덩이 옆 또는 무릎 위에 안착해서 코를 골던 강아지가 무덥던 여름에 죽어나갔을 때부터? 우리 가족 넷은 각자 전혀 다른 것을 재미있어하고 서로의 것에 관심이 없거나 염증을 느낄 테다. 어쩌면 달라진 것은 없기도 하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몇번이나 보내면서 메모장에 이 글을 썼다. 여기를 떠나도 "하나도 슬프지 않아서 슬플" 것이다. 뭔가 있는데 없다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그렇게 촌스럽지만 "살아있는" 어른의 삶을 얼마간 더 살 것이다. 보태보자면, 어른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들에 어쩌지 않는 것이다. 6학년 때부턴가, 아침자습 때 NIE 활동지를 시간 안에 마치기가 너무 힘들어서 나사를 빼고 대충 살아가기로 마음먹길 잘했다. 하물며 이제 우리는 횡단보도 초록불이 깜빡여도 뛰어갈 힘이 없다. 그러니까 질렸다, 서울이 싫은데 좋은 척하지는 않을란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아파야만 어른이란 건 개소리다. 그런데 어른은 아프다.
꿋꿋하게 또는 뻔뻔하게 동화를 쓰는 어른이 되려고 했는데 담배를 피고 싶어서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