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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Sep 03. 2021

복희를 사랑하지 않지만

나의 할머니, 이복희. 일곱의 자식을 키워내고 바쁜 나의 엄마아빠를 대신해 나와 동생들을 돌봐준 사람. 나는 복희를 사랑했지만, 복희의 사랑은 기울어져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학교에서 간식을 나눠주면 먹지 않고 가방에 챙겼다. 맛있는 걸 볼 때마다 집에 혼자 있는 복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복희에게 내밀면 복희는 베개 밑에 집어넣고는 나중에 먹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학교에서 돌아온 남동생에게 몰래 내밀었다. 복희의 사랑으로 이미 뚱뚱해진 동생은 내가 가져온 빵이나 사탕 같은 간식을 우걱우걱 먹어댔고 어쩌다 나에게 들켜 왜 할머니가 안 먹느냐고 화를 내면 복희는 먹었다고 대답했다. 복희의 입을 거쳐 그녀의 위와 장에 안착해야할 나의 사랑은 늘 동생의 포만감으로 마무리됐다. 성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복희가 좋아하는 순대 가게에 들러 복희 몫의 순대를 사 오는 것도 닭발을 사다 주는 것도 나였는데 내가 사 온 것들의 일부는 늘 남동생의 몫이었다.          

     

하루는 어디에서 놀다 들어온 남동생이 복희에게 배가 고프다고 했다. 복희는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나에게 계란후라이 좀 부쳐주라고 했고 나는 쟤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며 대들었다. 복희는 동생이니까 누나인 내가 밥 좀 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고 나는 복희에게 나도 초등학생이라고, 쟤랑 나는 한 살 차이 밖에 안 난다고 항변했다. 복희는 나보다 더 큰 목소리로 성을 내며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는게 아니라고 했다. 복희의 말에 부아가 치밀어 씩씩거리며 집을 나왔다. 지금도 계란후라이 만큼은 기가 막히게 요리해내는 남동생의 요리 실력은 전부 내 덕이다.          

     

열다섯 살쯤, 8월의 어느 날. 어떤 조상의 제사인지도 모르는 제삿날, 여자들이 거실에 모두 모여 요리하느라 분주했다. 그 틈에 어린 나도 끼어있었다. 기름 열기 때문인지 그냥 내 마음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뜨거웠고 마침내 사건이 터졌다. 나는 제사음식 중에서도 고구마튀김을 제일 좋아했다. 고구마튀김은 요리하고 바로 먹어야 제맛이다. 고구마를 노릇노릇 튀겨대는 작은 엄마 옆에서 나는 이건 너무 작아서 상에 올리지 못하겠네요, 이건 너무 타서 상에 올리지 못하겠네요. 라고 말하며 입속으로 고구마튀김을 넣었다. 작은엄마는 할머니가 보면 야단난다고 경고했지만 제사가 끝나고 눅눅하고 차가운 고구마튀김을 먹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거실에 등장한 복희가 조상이 손도 대지 않은 음식에 손을 댔다며 나를 나무랐다. 그러고는 대접에 크고 예쁜 고구마튀김을 담았다. 고구마튀김이 가득 담긴 그릇은 안방에서 티브이를 보는 남자들에게로 건네졌다. 여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불 앞에서 요리하고 있는 동안에 아빠와 작은 아빠, 남동생과 사촌 동생은 티브이 앞에 앉아있거나 누워있었다. 더군다가 여자들은 손도 대지 못하는 음식들을 먼저 맛보았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복희에게 대거리하다가 벌떡 일어났는데 일어나면서 그만 수납장을 쳤고 탁상시계가 떨어져 그대로 복희의 머리에 꽂혔다. 망할년을 시작으로 온갖 욕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씩씩대며 나는 또 집을 나왔다. 복희에게는 조상보다도 아들이 더 먼저였다. 복희의 수많은 불평등한 처사 앞에서 왜, 라고 물을 때마다 아들이니까. 를 들으며 나의 전투력은 상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페미니스트로 나를 탄생시킨 것은 복희다.     

               

어느 순간부터 복희를 위해 간식을 가져오지도 순대나 닭발을 사 오지도 않게 되었다. 심부름을 시키면 억지로 가긴 했지만 내 마음이 먼저 동하지는 않았다. 복희를 향한 나의 사랑은 점점 작아지다가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복희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잠을 잤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아침에 겨우 일어나느라 바빴고 밤에는 야자까지 하고 늦게 들어오는 탓에 복희와 대화를 나눌 일도 싸울 일도 없었다.          

     

내가 대학에 갈 즈음 복희는 치매에 걸렸다. 오랜 물질생활과 4.3 때 고문을 받았던 탓이었을까. 우리 가족이 복희의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치매가 악화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복희의 기억에서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거동도 불편하게 되자 결국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다. 사라질 것 같지 않았던 복희의 호기가 사라졌다. 눈을 껌뻑이는 것마저 복희에게는 버거워 보였다. 종종 문병을 가도 복희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을 떴다가 우리를 흘긋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잤다. 그런데 남동생이 가면 달랐다. 복희는 오랫동안 남동생을 봤고 어떨 때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세상과 작별을 준비하는 시간에도 끝끝내 기억의 마지막에는 남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복희에게 왜 그렇게 남동생이 소중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복희는 내가 죽으면 제사를 지내 줄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복희가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녀를 기억해 줄 사람. 아들. 아들의 아들. 복희를 영원히 살게 해주는 존재였기 때문에 복희는 그토록 남동생을 사랑했던 것일까.          

     

내가 복희의 부음 소식을 들은 것은 인도 바라나시에서였다. 복희를 돌보던 수녀님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부랴부랴 해외전화가 가능한 카드를 사고 집으로 전화했다. 이미 복희는 땅에 묻히고 며칠이나 지난 후였다. 가족들이 급하게 나에게 연락해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말하지 않은 것도 내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숙소로 돌아와 펑펑 울었는데 복희가 세상을 떠나서 슬펐던 것인지 내가 복희의 마지막에 없어서 슬펐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람살라에서 바라나시로 오는 낡은 야간버스에서 잠깐 눈을 떴을 때를 복희가 세상을 떠난 순간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보고 너무 황홀해서 아, 자면 안돼. 별을 더 봐야 해 라고 생각한 후 그대로 다시 잠에 곯아떨어졌었다. 아직도 그 밤의 별이 생생하다. 싸우는 기억이 팔 할이지만 복희는 나를 길러준 사람이니까. 복희와의 작별을 나는 그렇게 낭만적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남동생은 몇 년 전 엄마·아빠가 돌아가시면 더는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복희를 사랑하지 않지만 부디 그녀가 이 사실만은 모른 채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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