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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Oct 07. 2021

복희의 유산

복희를 닮아버린 어떤것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복희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1933년생 복희는 나와 남동생을 지독히도 차별했다. 기억을 잃고 죽음으로 가는 순간에도 복희는 내 동생만은 기억했다. 장남이라고 불리던 동생. 복희가 가장 아끼던 아들의 아들. 동생이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복희의 애정이 닿지 않는 것이 없었고 나는 질투와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복희를 대했다. 왜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욕지거리가 날아들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속솜허라(조용해라)’라는 말이 다였다.     


1950년, 복희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동원이 죽었다. 이념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 복희의 남동생도 불순분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탄약고에 넣어진 채 몰살당했다. 소식을 들은 복희는 울면서 탄약고 터로 갔다. 죽음을 예견한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가면서 흔적을 남기기 위해 던져놓은 신발을 길잡이 삼았다. 온 시체가 뒤엉켜져 있었다. 동생의 시체를 수습하려 했지만, 군경의 방해로 그마저 쉽지 않았다. 동생을 죽인 사람들이 복희를 찾아왔다. 이미 죽어버린 동생을 행방불명자로 낙인찍고 동생의 행방을 대라고 복희를 고문했다. 열흘 동안 갇혀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다.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에 넣었던 고문이 복희에겐 가장 끔찍한 기억이다. 남동생을 잃어 마음이 찢겼고 고문으로 몸이 찢겼다. 제주4.3이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남동생이 죽자 동네 사람들은 아들 없는 집안에 참견하기 시작했다. 집안의 재산과 제사를 둘러싼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결국 멀고 먼 친척을 죽은 남동생의 자리에 데려왔다. 그런데 그 양자마저 일찍 죽어버렸다. 그래서 복희에겐 아들이 귀했다. 복희의 아들은, 성은 달랐지만, 연이어 죽어버린 이씨 집안의 아들들과는 달라야 했다. 그 아들의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복희의 손자도 건강하지 못했다. 복희의 애정이 손자에게로 점점 기울어져 갔다. 

    

반면 나는 계속 속솜해야했다. 복희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덤벼드는 손녀딸이 못내 못마땅했다기보다는 두려웠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까봐,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럴까봐 걱정되었다. 정치인이 되고 싶다던 초등학생의 나에게 복희는 속솜허라. 라고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큰일 난다고 그건 죽는 일이라고 복희는 말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고 말하거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복희는 조용히 하라고 화를 냈다.     


그런데 복희는 알까. 나도 복희의 어떤 점을 닮아버렸다는 것을.     


80년대,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4.3 진상 규명 운동이 한창이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한 두려움에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던 그 일을 복희가 입 밖으로 꺼냈다. 용기를 내어 증언하고 인터뷰를 하고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했다. 어떤 인터뷰에서 복희는 그때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사지가 마비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복희는 꾸준히 용기를 냈다. 가족들도 복희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용기와 두려움을 왔다갔다하며 복희는 또 수십 년을 살았다.     


2011년 겨울, 오랫동안 치매를 앓았던 복희가 숨을 거두었다. 지난한 삶이었다. 다리는 이미 썩어 곪아가고 있는데도 숨은 쉬며 끝내 살려고 했던 복희가, 죽었다. 죽기 몇 해 전, 복희가 기운이 있을 때, 복희는 죽은 남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하루 몇 시간씩 통곡을 했다. 누군가의 통곡 소리를 듣는 것이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복희의 기억 깊은 곳에 풀어지지 않은 응어리가 치매라는 이름으로 마구 쏟아졌다. 복희는 도저히 기운을 차릴 수 없을 때까지 동원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또 울었다. 기억이 점점 옅어지고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복희가 그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살지 않아도 되니까.     


작년 나는 4.3 희생자 유족증을 발급받았다. 복희의 끔찍한 경험 덕분에 나는 항공료도 40% 감면 받고 각종 관광지에도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혜택을 누릴 때마다 복희가 동원을 부르며 통곡했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뒤숭숭하다. 훈장도 뭣도 아닌 애매한 증서를 복희는 나에게 남겼다. 그리고 내 DNA에 새겨진 복희의 용기. 나는 그 용기를 발판삼아 나와 남동생을 차별하는 복희에게 대들었다.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낸다. 더는 정치인은 되고 싶지 않지만, 정치적인 사람으로 존재한다.     


복희는 알까. 내가 복희의 어떤 점을 닮아버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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