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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Dec 18. 2021

21세기 전통가옥

그런 집에서 자라서 내가 되었다.

21세기에 그런 집에 사는 사람은 어쩌면 우리 가족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말고도  다른 초가집이 성당 가는 골목에    있었지만 내가 중학생  이미 사람이 떠나고 남겨진 빈집은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리 동네와  동네를, 아니 제주도 전체를 털어도 2000년대에 초가집에 사는 사람은 우리 가족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스무 살 중반까지 살던 우리 집은 백 년쯤은 된 오래된 집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밖으로 문이 통하는, 정지라고 불리는 부엌이 있었고 할머니가 쓰던 안방 뒤에는 곡식을 저장해두는 고팡(곳간)이 있었다. 나무판을 짜 넣은 마루 밑에는 고양이가 살았다. 우영이라고 불리는 집 뒤의 작은 밭에는 할머니 나이와 같은 감나무가 매해 주렁주렁 감을 쏟아냈다. 그 감나무를 지키는 것은, 미대에 다니던 작은 아빠가 만든 벌거벗은 여자 석고상이었다.


오래된 집에 사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지만 집을 새로 지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아빠는 목돈이 생길 때마다 집을 수리했다. 마루를 뜯어내고 현관과 거실을 만들었고 정지를 없애고 거실에 싱크대를 들여다 놓았다. 창고에 보일러를 설치해 온 방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도록 했다. 외관은 전통가옥의 모습을 했지만, 내부는 현대 가옥의 구조를 옮겨다 놓은 기형적인 집이 탄생했다. 그런 집이 살기 좋을 리 없었다.


외부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대공사를 할 수가 없어서 변기만 붙여놓았다. 어릴 적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변소통에 사는 귀신이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를 건네지는 않을지 불안에 쫄아야했다. 밤에 화장실에 갈 때는 할머니와 꼭 함께 갔는데 혹시 할머니가 나만 두고 갈까 봐, ‘할머니 거기 있지? 노래 불러줘.’하고 계속 확인해야만 했다. 똥차를 불러 변소통에 쌓인 오수를 치우는 건 매해 치러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였는데 냄새가 말도 못하게 지독했다. 오수차에서 우리 집 변소로 연결된 파란 호스 때문에 똥냄새의 원인이 우리 집이라는 걸 지나가는 친구들이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봐 그날은 온종일 창피했다.


똥차를 부르는 일 말고도 매해 치러야 하는 일은 또 있었다. 오래된 초가지붕 위에 새로 새(이엉)을 이는 일이었다. 말린 억새 더미를 마당에 잔뜩 쌓아놓고 새를 이는 기술자를 불러 지붕을 새로 덮었다. 굼벵이가 가끔 떨어지는게 보기가 싫어 나는 그날을 싫어했지만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잔뜩 준비한 새참은 내 몫으로도 떨어졌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좋아했다. 어린 나는, 막걸리를 잔뜩 먹은 남자 어른들이 지붕 위에 벌개진 얼굴로 능숙하게 일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쯤 기술자 할아버지가 너무 늙어서 일을 못하게 되자 새 지붕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여름에는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 아래 평상에서 누워서 책을 읽었다. 가을이 되면 큰 대추 알이 후드득 떨어지기도 했는데 우리 가족이 먹을 만큼 열리고도 남아서 놀러 오는 모든 사람에게 넉넉히 나눠주었다. 고기를 먹는 날에는 우영밭에 자란 상추를 뜯어와서 먹었고 대나무 새순이 자라면 할머니는 새순을 캐다가 나물을 무쳐 먹었다. 엄마 아빠는 식목일이 되면 우리를 농협에 데려가서 과일나무 하나씩 고를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나무들을 우영에 심었는데 그 과일나무들은 도무지 열매를 맺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떤 해에, 배나무에 작은 배가 두어 개 열렸다. 내 인생에서 먹어본 배 중 가장 달았다. 엄마는 어디선가 석창포를 얻어다가 우영밭에 심고 가꾸었다. 엄마는 석창포를 달인 총명탕을 우리에게 먹일 꿈을, 아니 우리가 총명해질 꿈을 꾸었으나 엄마 꿈대로 되었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그 우영밭에는 과일나무와 석창포도 있었지만, 구렁이도 있었다. 내가 열 살쯤 되던 해였나. 우영밭에서 부엌을 뚫고 구렁이가 나왔다. 깜짝 놀라 쓰러질 뻔했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마침 집에 와있던 작은 아빠가 내가 합기도에서 쓰는 죽도로 구렁이를 쫓아냈다. 할머니는 구렁이를 죽이지 말고 쫓아내기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구렁이를 쫓아내고 할머니는 묵주를 들고 묵주기도를 했다.


과거의 나는 우리 집을 싫어했다. 오래되고 허름한 집. 겨울에 온수를 쓰기 위해서 큰 솥에 물을 데워 큰 대야에 찬물과 섞어 써야 하는 집. 냄새나는 화장실이 있는 집. 그마저도 겨울에는 엉덩이를 찬 공기에 내놓아야 했던. 어떤 날에는 지네가 잠자는 나를 콱 물어버리고 가던 집. 비가 많이 오면 비가 새기도 하던 집. 여름에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겨울에는 바람이 송송 들던 우리 집. 나는 그런 집에서 스물다섯 살까지 살았다.


감과 대추가 영글던 집, 대문이 없어서 동네 개들이 아무렇게나 드나들던 집, 따뜻한 담요 속에서 귤 까먹으며 겨울을 나던 집, 화장실에 간 나를 할머니가 지켜주던 집, 우리를 먹이려고 밤낮없이 일하던 엄마 아빠가 있던 집. 가난은 서러웠지만 애틋했다. 나는 그런 집에서 스물다섯 살까지 살았다.


그 집에서 살면서 나는 나로 자랐다. 길을 가다가도 문득 내가 살던 집처럼 허름한 집을 보면 꼭 나 같은 어린아이가 있을까 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나로 자랐다. 나 같은 어린아이는 나보다 더 행복했으면 막연히 바라는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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