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경 Sep 10. 2020

헐랭주부란 무엇인가?

나는 헐랭주부다

대충인 듯 대충 아닌 대충 같은 살림 솜씨

 

나는 손끝이 야무지지 못해서 뭘 하나 짚으면 꼭 처음에 한 번은 떨어 뜨린다

소금통을 집다가도 퉁! 하고 놓쳐 운 좋으면 그냥 놓친 정도로만, 나쁘면 소금이 촤~ 염전을 펼쳐 놓는다


숟가락을 짚다가도 꼭 한 번은 떨어 뜨리는데 이제는 기특한 신체가 알아서 반응하는 경지에 이르러 손에서 숟가락이 빠져나가는 순간 발을 잽싸게 피해 발등 낙하를 기가 막히게 피한다. 나만의 노하우라면 노하우. 발이 절로 쏙~ 숟가락 낙하지점을 벗어나 스스로를 보호한다


이런 식으로 운이 좋으면 그냥 다시 한번 줍는 정도, 좀 나쁘면 약간의 청소시간이 발생하고, 신체가 적응한 순간에는 희열을 느끼며 기뻐한다.

 

"오호~ 숟가락 피했고~"

(칼을 떨어 뜨리는 경우 스릴 1000배)


이런 헐랭 주부가 어제 돈가스를 처음 만들어 봤다

조금 짠 것과 튀김옷이 고기에 착붙되지 않은 것만 빼고는 너무 완벽했다

고기 연마 솜씨라던가 굽기 정도?

심지어 치즈 돈가스도 완성했는데 비주얼이 어마어마했다

 

설렁설렁해도 설렁설렁하다 보면 또 되는 건 된다


나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집중력이 없다

분야라기보다 나 자체가 집중력이 없다 보니 뭘 해도 그런 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에도 한 권 다 읽고 다음 책.. 이런 식의 순서가 없다

때때마다 읽고 싶은 책이 있고, 이 책을 읽다가도 다른 책이 생각나면 다른 책으로 바로 갈아탈 수가 있다

티비 채널도 마찬가지.

드라마 하나를 보고 있다가도 갑자기 어떤 예능 프로그램이 생각나면 그냥 돌린다

리모컨 주도권이 없을 때에는 핸드폰으로 갈아타며 같이 보는 사람의 김을 새게 하는 경우도 있다


채널 변경에 있어서는 가족들에게 욕을 꽤 먹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꼭~ 채널을 바꾼다는 점이다. 나를 물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엄마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등짝을 많이 처맞았다.


"아따!!! 좀 볼라 하면 돌리고. 볼라 하면 돌리고! 지금 하이라이튼데!!!"


퍽!!!  

 

나는 이상하게 절정의 긴장감을 느끼는 순간 딱 멈추고 싶다.

내용을 아끼는 건지 스릴을 감당 못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보니 세상에... 살림에서도 이런 식으로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예를 들어 빨래를 건조기에서 꺼냈으면 빨래를 게고, 옷장에 정리하는 게 원칙이라면 원칙인데

나는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를 거실 한편에 던져 놓고 난데없이 설거지를 하거나, 딸 방을 정리한다


또는 설거지의 순서로 보자면 1. 건조대에 있는 물기가 마른 그릇들을 먼저 정리하여 건조대를 비우고 2. 설거지를 하고 3. 싱크대를 닦는다 정도가 순서일 텐데

나 같은 경우는 1. 건조대에 물기가 마른 그릇들을 싱크대 위에 펼쳐 놓는다 2. 설거지를 한다 3. 빨래를 갠다 ;;


다 씻은 그릇들이 마른 아이는 싱크대 위에, 젖은 아이는 건조대 위에 놓여 있고 싱크대는 예를 들면 딸 방 청소를 마친 후에 닦는다.


틀에 박힌 루틴을 싫어한다고나 할까...?

(라고 한다면 엄마한테 또 맞을지도)


그래도! 내 주방은 깨끗하다

빨래는 결국 옷장 안으로 들어가고

언젠가 딸 방도 정리가 된다


나 스스로에 대해 기대치가 없어서일까

두서없는 살림 솜씨 주제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근데 나는 손이 빠른 편이다 

여기저기 설렁대며 다니는  같아도 나름 후다닥 하는 면이 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죙일 설렁설렁  하는 거지 싶지만 어느 순간 이거 언제 했지? 눈을 의심하게 하는 살림 솜씨!


헐랭 주부란 바로 이런 것!

이것이 바로 헐. 랭. 주. 부이다


나는 유튜브로 살림 로그 보는 걸 좋아한다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싶다가도 핸드폰을 내려놓고 집 안을 둘러보면 헛웃음이 나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스타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대충 #설렁하면 어떠랴

밥때 밥 먹고, 깨끗해야 하는 곳 깨끗하면 되고, 하루 안에 끝내야 할 일 하루 안에 하면 되고, 내일까지 해도 되면 내일까지 미루면 될 것을.


그래서 나는 지금 점심으로 소고기 뭇국을 끓어야 하는데 설렁 인 듯 뚝딱 또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헛소리 대잔치를 먼저 한다.

 

헛소리 대잔치는 또 무엇이냐?

바로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



 


  

작가의 이전글 아줌마의 영어 공부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