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내는 사람 Apr 04. 2024

공정한 차별

 맞고 자란 아이가 때리지 않는 부모가 되리라 다짐하듯,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평한 부모가 되겠다 맹세했었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을 다 키운 지금, 나의 신념이 무섭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무조건 똑같이 대하고 나눈다는 게 과연 차별 없는 것일까?


 공정은 주로 판단의 영역이고 공평은 분배의 영역이며 평은 가치의 영역이라고 한다. 법의 집행은 공정해야 하고 노동의 대가는 공평히 하며 남녀는 평등하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와 기억이 쉽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이 세 가지의 개념을 한데 섞어 '얼추 비슷한 몫'만 계산하여 나누며 내가 옳다고 스스로 만족해 왔다. 가정이 아닌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과 그럼에도 별 빛을 보지 못한 사람, 그리고 전혀 노력하지 않은 사람 모두를 똑같이 대우한다면 그 공동체결국 붕괴될 위험이 크다.


 우리나라도 선진국형 복지국가를 건설하겠다고 근래에 '별의별' 수당이 생겨났다. 지원받아 마땅한 이들 외에, 그 제도를 야무지게 이용해서 행복해진 사람도 있겠지만 선량한 피해자가 더 많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 몫의 대가를 순순히 나누거나 어쩔 수 없이 갈취당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거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얌전한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 듯, 성실한 사람이 비뚤어지면 답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투정 부리느라 드러누운 애를 달래는 것보다 열심히 걸어가는 아이를 격려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한다. 혼자서도 잘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부모에게 받아왔던 차별은 다른 형제보다 더 노력하고 성과를 냈어도 인정받지 못했음에 느꼈던 감정이지 가만히 앉아서 남들과 같은 대접을 받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래서 그저 아이들을 무조건 똑같이 대하면 공평한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본래 추구하던 무(無) 차별이란, 공평한 분배보다는 공정한 판단이 맞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정한 판단 후 그에 따른 공평한 분배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을 무시하고 아이 셋을 아무런 조건 없이 무차별로 키우겠다는 내 야망은 아이들이 커 갈수록 무너질 신념이었다. 각자의 생각과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대우가 가능할까.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사회현상이 한때 지탄받아왔다. 그것을 개선해 보겠다고 다양한 유형의 입시제도와 취업형태가 생겨났지만 오히려 투명성과 공정성에 의심받으니 공평은 생각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항은 전문가나 정치인의 몫으로 돌리고 나는 내 가정이나 신경 쓰자. 내가 바라는 건 나의 이익이 아닌 아이들의 행복이니까 대응책이 다르다.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공정한 판단의 조건은 아이들의 능력이 아닌 노력이다. 잊지 말자. 노력 앞에서는 누구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음을, 어떠한 핑계도 노력 앞에서는 통하지 않음을, 그리고 이러한 나의 생각을 이해 못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아이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변치 않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심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