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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는 사람 Apr 05. 2024

권력의 이동

 주변을 보면 부부 나이가 마흔을 훌쩍 넘기고,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벗어나 한숨 돌릴 즈음 새롭게 나타나는 피보호자가 있다. 부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상대는 계획에 없던 늦둥이나 반려동물이 아닌 그들의 부모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흔쾌히 돕는다. 예전 같지 않으신 부모님이 짠하고, 뒤늦게나마 효도를 하고 싶어 진다. 자잘한 것부터 굵직굵직한 것까지, 내 손길이 닿는 만큼 부모님이 뿌듯해하시고 나의 보람도 커지는 것 같다. 그런데 횟수가 증가하고 기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마음이 변하게 된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는 그 이유가 체력적으로 힘들고 병원비 등의 경비지출이 부담스러워서라고 막연히 짐작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그것보다는, 자신이 기댈 큰 산이 없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서일지 모르겠다.


 부모님은 내게, 언제나 태산이었다. 바로 옆에 있어서 잔잔한 바람과 즐거움을 주는 앞뒷산이 아니라 너무 멀리 있어서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은 큰 산이었다. 산수화에 나오는 태산 아래 점 하나 찍힌 나그네처럼 나는 그저 나의 갈 길만 바지런히 걸어왔고 지금까지도 그랬다. 나그네 따위 아랑곳 않는 병풍 같은 그 존재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동산이 주는 자잘한 혜택이 없는 대신 산사태 같은 재해도 없었다. 부모님은 나와 완벽히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비록 남들처럼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연로하신 부모님한테서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덕분에 나는 이 나이에 아직 부모님의 보호자가 안 된 흔치 않은 사람인데, 어쩌다 보니 보호자가 되기도 전에 피보호자가 되어버렸다.




 남편이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다른 사업을 시작하면서 큰애가 회사의 실세가 되었다. 프로그램 개발만 조금 도와주면 될 거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귀국했던 큰애는 금세 당황하고 곤란해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직원을 뽑거나 회의를 주재하는 것까지, 모든 업무는 큰애의 일이 되어버렸다. 20년을 넘게 남편이 운영해 오던 회사가 갓 스무 살을 넘긴 아이 손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아이는 모처럼 자신의 '최선'을 다 하며 회사의 체계를 잡아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수시로 화상회의를 하며 자신의 몫을 다하려 애쓰고 있다. 본업에 힘쓰기도 하루가 빠듯한 개발자가, 나머지 시간은 아빠의 회사 일에 몰두하면서 아이가 느낀 감정은 무얼까?


 나는 우리 집의 가장이 바뀌고 있음을, 가장의 권력이 남편에게서 장남에게로 이동하고 있음을 느꼈는데, 이건 참 반갑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이가 대견하다고 생각되는 것과는 별개로 이제 우리의 시대가 끝났음을, 더 이상 우리 부부가 자식들의 보호자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 같은 이 상황이 왠지 나를 서럽게 만들었다. 큰애에게 묻고 의논하고 큰애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는 남편을 보며 이제 큰애는 내게서 멀어진 또 하나의  태산이 되는 듯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둘째도 셋째도 언젠가는 태산이 되고 나는 다시 점 하나의 나그네로 남겠지. 자식이 부모의 산이 무너짐을 서운해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신의 산이 무너지고 있음에 훨씬 더 큰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건 참 서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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