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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아 Feb 16. 2021

겪어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

나는 쿨 할 줄 알았다

그냥 훈련소 들여보낼 때 눈물 찔끔 나고 말겠지, 뭐가 대수랴. 남의 아들 보면 진짜 금방 제대더라. 요즘 군대는 복무기간도 짧고 예전만큼 고생스럽지도 않으니 할 만한 데다 저녁에는 자기 계발할 시간까지 줘서 멋지게 몸 만들거나 시험 준비를 한다지 않는가? 무엇보다, 도시 중산층의 안정적인 세상에서 비슷한 친구들과 지내온 아들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겪으며 더 큰 시야를 갖게 되길 나는 바랬다.  


게다가 아들은 카츄샤에 붙어서 부러움도 샀다. 코로나 시국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카츄샤는 한국 명절 미국 명절 모두 쉬고 주말마다 집에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뭐? 주말마다? 헐, 그게 군대야?" 


석 달 전부터 시작된 이상 증세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입대일이 결정된 석 달 전부터 나에게 이상증세가 시작됐다. 한없이 우울하고, 이유 없는 불안감이 나를 지배했다. 평소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온갖 사소한 것에 불안하고 초조했다. 


고도근시인 녀석의 시력 수술도 시켜야겠고, 치과 검진도 받아서 문제 있으면 치료도 받게 해야겠고, 체력적으로 엄청 고생하지 않으려면 미리 운동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아들은 맘처럼 움직여주질 않았다. 


라섹 수술을 받으면 바로 끝이 아니라 충분한 회복기가 필요했고 치아도 혹시 신경치료까지 받아야 하면 한 달씩 걸리기도 하니까 나는 하루가 급한데, 아들은 마치 어디 내과 가서 감기약 타 오는 것처럼 아무 때나 내킬 때 하겠다고 시간을 끌어서 내 속을 끓였다. 


그뿐인가. 그냥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돌아다니며 놀아도 몸을 움직이는 거니 괜찮은데, 코로나 때문에 거의 집-아니 방-안에서만 지내지 않는가. 하루에 몇 백보도 안 걷고 침대에 엎드려 폰만 들여다보는 것 같아 '가서 얼마나 힘드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 모든 걸 비협조적인 아들을 설득해 가며 늦지 않게 해결하는데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만큼은 포기하고 얼마만큼은 어거지로 준비를 마쳤는데도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갱년기인가? 코로나 블루인가? 맞아, 시설이 문을 닫아 한참 운동을 못 하니 마음까지 이렇게 영향을 받는구나.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하게 바라봤다. 


아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생각했다는 어마어마한 착각

입대 당일, 시간 촉박하게 도착해 정신없이 훈련소에 휘릭 들여보내고 말았다. 나는 주차 대기를 하느라 못 내리고, 애 아빠가 아들과 함께 입영 장소로 들어갔다. 평소 살갑지 않은 아들이다 보니, 이럴 때라도 한 번 안아봤어야 했는데, 차 안에 앉아 작별을 한 것이 너무 속상하다.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너무 허전하고 후회스럽다. 

내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이 모두 빠져나가고 뻥 뚫린 듯하다. 위장은 차 있는데 자꾸만 허기가 진다.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이르게 사춘기가 왔고, 이후 내내 서먹하게 굴었다. 나도 자식을 케어하는 엄마의 삶보다는 나 자신의 삶을 더 중요시해서 친구들로부터 날라리 엄마 소리를 들어왔다. 아이 학원 스케줄을 짜고 거기에 맞춰 차로 태워다 주는 '라이딩 맘' 같은 건 나에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5~6 정거장 거리의 고등학교도, 기껏 한 군데 가던 학원도 내내 자전거를 타고 알아서 다녔다. 아들 성향도 그러하거니와 나는 아들을 독립적으로 키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어마어마한 착각이었다. 잘 생각해보니 나는 여태 아들을 품 안에 끼고 살았다. 따져보니 아들은 만 20세가 넘도록 여태 3박 4일 이상 집 밖에서 지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는 초등학교 방학 때 한 달 이상씩 해외 영어연수를 보내기도 하고, 아예 조기유학을 보내기도 했으며, 또 누구는 운동시킨다고 중학교 때부터 합숙소에서 지내게 하기도 했고, 또 누구는 기숙사가 딸린 고등학교에, 아예 외국의 고등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재수를 하게 되어 기숙학원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대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해외 대학에 진학하거나 한 달 이상씩 해외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배낭여행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아들은 19학번이라 1학년엔 그것이 가능했다.)


21년간 사실상 내 품에서 한 번도 놓아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래서 자식을 떨어뜨려 놓고 애달픈 부모 마음을 아주 늦게 처음 겪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설 연휴 직후 입대라, 설 차례 지내고 생전 처음 우리끼리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수영도 하고 사진 찍고 밥 먹으며 하루 부대끼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더 섭섭할 뻔했다


이제 진짜 내 품에서 떠나보낸다 

겪어봐야만 아는 것들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군대에 안 갔다 온 사람들도 주변에서 군대 얘기를 하도 들어서 대충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가보면 완전 다르다고 한다. 보내는 부모 마음도 그렇다. '그게 뭐라고' 하며 우습게 생각했던 나는 그래서 더 크게 당했다. 


친정엄마도, 최근에 겪은 젊은 시이모님도 위로의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 내가 겪기 전에는 어른들이 그 마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미리 말해봤자 모를 것을 아셨던 것이다. 


처음에만 심난하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나중에는 휴가 오면 또 휴가냐고 귀찮게 느껴질 정도라고? 


하지만 내가 이번에 석 달에 걸쳐 심하게 '분리불안'을 겪은 건, 군 복무를 마친 뒤 아들의 몸은 돌아오더라도 정신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고, 나는 아들을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이라는 예감 혹은 각오 때문이다. 우리 가족의 삶은 전과는 다를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더욱 마지막인 것처럼 굴었던 것 같다.  


오후 2시에 논산훈련소에 아들을 들여보내고, 6시 무렵 귀가해 저녁을 대충 먹고는 남편과 아들 방을 치웠다. 정리하다 말고 가버려서 어수선한 방을, 아무 말 없이 함께 말끔히 청소했다. 평소에는 제발 정리 좀 했으면 했는데 막상 깔끔해진 방을 보니 텅 빈 느낌이 더 크다. 

내 분리불안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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