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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작가의 ‘What’s in my bag?’

by 방송과 글 사이
작가님, 속옷… 어떤 거 입으셨어요?

녹화 날, 출연자 대기실 한쪽에서 S 아나운서가 다급하게 날 불렀다. 보통 방송국에는 의상팀이 있지만, 소규모 케이블 방송은 예산 사정이 다르다. 의상부터 액세서리까지, 아나운서가 직접 챙겨야 한다. 그런데 하루에 2주 치 녹화를 하다 보니, 두 번째 녹화 의상 안에 입을 속옷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준비해 온 상의 안에 입은 흰색 속옷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날, 어떤 옷에도 무난한 살색 메리야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 속옷을 벗어 건넸다.


“이거 입으세요.”


아나운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덕분에 살았어요”를 연발하며 연신 고마워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빤주만 빼고 다 줄 수 있으니까, 말씀만 하세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나보다 18살 어린 막내 작가가 마치 내가 오늘 갑자기 ‘작가계의 슈퍼 히어로’라도 된 듯이 올려다봤다.


“작가님, 진짜 대단하세요. 지난번에도 의상에 얼룩 있었는데, 작가님이 싹스틱(얼룩 제거제) 꺼내서 지워주셨잖아요. 저도 작가님처럼 준비 철저한 사람이 돼야겠어요.”


평소 내 원고에 대해선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던, 수줍음 많은 막내 작가가 내 ‘도라에몽 가방’을 칭찬하다니. 웃기면서 슬픈데, 조금은 뿌듯했다. 뭐라도 후배에게 본보기가 된다면, 그걸로 됐다.


여기서, 누군가는 ‘출연자가 왜 속옷까지 물어봤을까, 그리고 나는 왜 흔쾌히 내줬을까?’ 하고 의아해할 수 있다. 녹화장에서 출연자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사람은 바로 작가다. 그 출연자를 섭외한 사람도, 녹화 전에 그들이 할 멘트를 대신 대본으로 써주는 사람도, 출연자가 궁금한 것과 조율하고 싶은 부분을 가장 먼저 털어놓는 소통의 창구 역시 작가다.


방송 구성 작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출연자를 섭외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녹화 전, 작가는 대기실에서 메이크업과 분장을 마친 출연자와 대본을 조율하거나,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나는 주로 출연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힘쓴다. 조금은 과장되게 “오늘 의상과 메이크업 너무 어울려요!” 칭찬하거나, 지난 녹화 때 좋았던 점을 꺼내 말한다. 대본에서 새로 추가되거나 보완된 부분을 상기시켜 주고, 마치 귀빈을 모시듯 분장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스튜디오 안 의자에 앉기까지 에스코트한다.


‘우리 방송, 우리 출연자니까, 내가 먼저 귀하게 대해야 한다.’


내게는 늘 이런 생각이 있다. 농담처럼 빤주 빼고는 다 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진심이다. 녹화 날 그 누구보다 돋보이고 빛나야 할 출연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채워주고 싶다.

방송 작가의 ‘What’s in my bag?’

방송 경력이 쌓일수록 내 가방은 점점 무거워졌다. 물티슈, 휴대용 티슈, 반짇고리, 빗, 각종 화장품, 상비약, 필기도구, 수첩, 사탕, 장바구니 가방 등등. 이쯤이면 1박 2일도 거뜬히 버틸 정도다. 녹화 중에도 내 가방은 꼭 곁에 두어야 마음이 놓였다. 혹시 출연자 의상 단추가 떨어지거나, 머리 모양이 흐트러져도 괜찮다. 내 가방엔 반짇고리도, 빗도 있으니까.


녹화를 마치고 출연자들과 밥을 먹으면, 의외로 다음 녹화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방금 끝낸 녹화를 식사 자리까지 끌고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파워 J(계획형)인 나는 2주 뒤 녹화 주제를 미리 받아야 마음이 놓인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팀장님에게 운을 띄웠다.


“팀장님, 다음 녹화 주제 이야기 좀 할까요?”


나는 곧바로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받아 적었다. 메모하다가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서슴지 않고 말했다. 짧은 회의였지만, 메모해 두니 잊을 걱정이 사라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가방 속에는 늘 수첩과 볼펜이 있었다. 20년간 쌓인 노트만 해도 수십 권. 막내 시절에는 밥을 먹다가도, 자다가도 전화가 오면 벌떡 일어났다. 원하는 출연자를 섭외할 수 있다면 그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방송 작가의 ‘What’s in my bag?’

지금도 출근길에는 도라에몽 가방과 노트북 가방, 이렇게 두 개를 든다. 노트북 가방 안에는 노트북만 있는 게 아니다. 치약·칫솔, 방송국 출입증, 마우스, 이어폰, 노안 안경부터 필통에는 네임펜, 형광펜, 클립, 명함, 방송국 주차권까지 들어있다. 사실 8년 전에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한다며, 휴대전화 하나 겨우 들어가는 작은 가방만 들고 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엔 늘 불안했다. 녹화 출근날만큼은 준비된 가방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준비가 돼 있어야 덜 불안한 사람이다. 가끔 무거운 가방이 내 마음속 불안을 비춰주는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 언제, 내 가방 속 무언가가 누군가를 살려줄지 모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이 때문이라도 대일밴드를 추가해야겠다. 혹시 모르지. 내 가방 속이 또 한 번 누군가의 “덕분에 살았어요”를 만들어 줄지 그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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