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예비하고 사는 자의 겸허함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라면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할 것이다.
종편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라고 생각되는데
라디오처럼 시청자들의 사연을 받아서 상담을 해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다.
19금 내용의 사연을 주로 받아서 해결해 주는 내용이었는데
당시에는 꽤 파격적이었고 쉬쉬하던 이야기들을 양지로 끌어내는데 꽤 역할을 했던 프로였다.
오메기떡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던 기억이 나는데,
나에게 호감이 있었던 남자애가 그걸 가지고 장난을 쳐서 어이가 없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허지웅은 나에게 그런 이미지였다.
마녀사냥에 나왔던 사람, 더도 덜도 말고 그 이미지.
때론 조금 경솔해 보이기도 하던 사람, 마녀사냥이 폐지된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서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종종 연예 뉴스에 등장했었다.
아마 다른 프로그램에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그 프로에서도 하차를 하고 그가 혈액암 투병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즈음에 그의 부은 얼굴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연예기사를 본 일도 기억난다. 투병 사실이 알려지기 전이었는지 미용 시술 어쩌구 하는 기사에 얼굴이 부었다는 게 어떻다는 거지, 하며 기레기의 행태에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해야 할 일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던 어느 주말,
별생각 없이 '허지웅답기'라는 그의 유튜브를 보게 됐다.
마녀사냥과 비슷하게 사연을 받아 그것에 대해 응답해주는 내용이었다.
혈액암 투병 이후여서 인 건지,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그에게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았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느낌이 있다. 서늘하게 차고 단단한 느낌이.
그런데 허지웅 그에게서는 차가운 느낌은 없었다.
그는 이전보다 따듯한 느낌으로 다른 이들에 사연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의 유튜브 중에 듣고서 놀란 부분은 '피해자 정치'에 대한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연자에게
우리 사회에 만연한 피해자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 그때 나는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나도 어린 시절의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
어릴 때의 나에게 그렇게 해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난 좀 더 밝고 환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굉장히 순화해서 말하는 것이다.
내가 타고나고 부모가 만들어준 내 마음이 겨우 요만해서 이걸 다른 사람처럼 넓히기에는 너무 힘이 들고, 죽어라고 노력해도 그 마음자리는 말려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내가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내 마음은 겨우 이 자리에서 일센치도 늘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가끔 나를 우울하게 했다.
허지웅답기를 듣고 느낀 그때 그 마음을 정확히 옮길 수가 없었는데 그 이야기는 그의 책에서 한번 더 되풀이된다. 아니, 여러 번 되풀이된다.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판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낙인찍는 대신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p.257~258
과거는 변수일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 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p.261
그러면서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여러 번 반복한다.
내 상처가 너무 커서, 내 삶이 너무 애틋해서 자신과 주변을 파괴하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죽음을 예비하고 사는 자의 겸허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언젠가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것, 그게 당장 내일이어도 이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는다. 어쩌면 생각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고 싶다는 농담, 에서 허지웅은 항암 치료를 하면서 그 죽음을, 죽음과 유사한 체험을 하고 다시는 항암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다. 책을 읽으며 나로서는 알기 어려운 그 겸허함을 느꼈다.
허리를 다친 일이 있다. 그래서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하고 한 달간 침대에 누워서 지냈었다.
책에서 묘사하는 주사를 여섯 번쯤 꽂고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을 느껴본 일이 있다. 라인을 잘 못 잡는 간호사가 내 팔을 세네 번쯤 찌르고 다른 간호사가 와서 결국 다른 팔에 라인을 잡고 수액을 꽂고 CT를 찍으러 일어섰는데 결국 CT를 찍으러 가지 못했다. 몸이 너무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화장실에 가서 위액을 토해내고 다시 침대에 누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의 침대 생활로도 몸은 금세 근육을 잃었고 간단한 일상생활도 하기 어렵게 되었던 일, 누워서 볼 일을 봐야 했던 일들, 인간은 쉽게 존엄성을 잃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도 어떤 결심 비슷한 것을 했었다.
그런 경험들로 난 그가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은 쉽게 잊는다. 나에게도 그 아팠던 경험은 꽤 생생해서 한동안 그 마음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잊었었다. 이 책은 그때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허지웅은 고맙게도 그런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얻은 마음을, 단단하고 따듯한 확신, 겸허함을 담아 이 책을 쓴 것 같다. 재발해도 항암을 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고 살겠다는 말과 같게 들린다. 그가 말하는 그날 밤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결심 같은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왠지 미안하지만 나는 죽음을 예비하고 사는 자의 겸허함을 끝까지 모르고 싶다. 그가 쓴 책에 담긴 그 겸허함을 간접 경험하는 것으로 나도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배워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저 그의 얼굴밖에 모르는 나지만, 그가 앞으로 내내 건강하기를, 그의 삶이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책으로 써서 보여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에게 포스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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