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6년 차 아내가 생각하는 '남편'의 정의
새벽... 어디선가 다투는 소리,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에 잠이 깼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쫑긋 세우니, 어디선가 여자와 남자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인지 윗집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무어라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서러움이 느껴지는 여자의 절절한 외침. 그리고 중간중간 들려오는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
이불속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들려오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평소 같으면 잠을 깨운 소리가 원망스러웠을 텐데,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얼마 전 TV에서 본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란 프로그램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들의 사연을 듣고 해결책을 찾아 주려는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영상으로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관계가 개선되기를 기대하는 건 힘들 것 같은 남자와 여자. 왜 저럴까?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들의 행동. 그런데 방송을 조금 더 보고 있으면 남편과 아내 각자의 사연이 나온다. 그 사연을 알고 나면 남자도 여자도 모두 이해가 되었다. 결혼에 대해, 부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참 어려운 프로그램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평생을 동반자로 살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결혼 6년 차인 나는 지금에서야 결혼 전, 혹은 결혼 초기에 가졌던 생각들이 많이 바뀌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당신도 나와 똑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구나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관계에서도 완벽한 믿음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내 마음 하나도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데, 누가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기대고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6년이란 시간을 살면서 내가 알게 된 건, "나는 당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란 사실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투는 소리가 잠잠해졌다. 더 이상 큰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저 집도 오늘 잠은 다 잤겠구나.' 생각하면서 옆을 돌아봤다. 내 옆에는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곤히 잠들어 있다. 내 잠은 이미 날아가버린 듯하여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 앞에 앉아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남편'이란 두 글자에 대해 정의해보기로 했다.
'남편'의 사전적 의미는
'혼인하여 사는 남자를 그 아내의 기준으로 일컫는 말, 아내의 배우자' 혹은 '혼인관계에 있는 두 사람 중 남성 쪽을 일컫는 호칭'이다.
男 '사내 남'자에 便 '편할 편'자를 쓴다. '사내 남'자는 알겠는데, 왜 '편할 편'자를 쓸까? 궁금증이 생겨 사전에서 '편할 편'자를 찾아보고서 깜짝 놀랐다. '편할 편'자는 '똥오줌 변'자 이기도 하단다.
하하. 나만 웃긴가?
결혼 6년 차, 내가 생각하는 '남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하나.
'남편'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어떤 날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내 편, 영혼의 동반자, 소울(soul) 메이트 같다가...
어떤 날은 세상에서 가장 멀리 있는 '남(타인)' 같다.
둘.
이쯤 되면 '남편'에 대해 좀 알겠다 싶은 순간마다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랄까?
"저희 남편은 눈이 참 동그래요."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어쩌면 남편에게는 별 모양의 눈도 있을지 모르겠다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보고 있는 모습 이면에 또 다른 모습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우리는 변화무쌍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동시에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는... 어쩌다 보니 자아성찰과 자기 계발을 독려하는 사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셋.
'남편'은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다.
아마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메두사 즈음으로 여기는 것 같은 남자. 세상에 존재하는 남자들 중 내 눈총을 가장 많이 받는 남자, 그래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무서워하는 남자.
*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다. 눈을 마주치면 돌로 변해버린다. 그리스어인 Μέδουσα의 뜻은 '지배하는 여자'. 어떤 의미에서 남편은 내가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 생각하는 듯하다.
남편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는 아마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6년 동안 알게 된 '남편'이란 존재는 이러하단 얘기다. 결혼 10년 차에는 '남편'의 정의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궁금하다.
느닷없이 새벽에 일어나, 곤히 자고 있는 남편 뒷이야기를 하는 기분이다. 신난다.
우리는 모두 닮은 것 같다. 꽤 괜찮아 보이는 날도 있고, 꽤 못나 보이는 날도 있다. 좋은 성품도 가지고 있고, 동시에 몹쓸 성품도 가지고 있다. 서로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결혼을 했겠지만, 콩깍지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순간들이 왔을 때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군요." 인정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그 사람의 연약하고 말랑말랑한 진짜 모습을 조금이나마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 그제야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안아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부디, 오늘 밤은 (옆집인지 윗집인지) 잠 못 이루었을 남자와 여자에게도 편안한 밤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어둠과 고요 속에서 꿀잠을 잘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