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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 Mar 29. 2021

여행

너무 멀었다.

남자친구와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준비하던 때다. 당시 남자친구와 나는 3년간 활동하던 극단에서 퇴직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미래에 대한 걱정에 머물러 있었다. 과거를 떨치기 위해서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고민을 떨쳐내고 과감한 걸음을 내디뎌 보기로 결심했다. 각자 모아 둔 돈으로 영국 도착 비행기 표와 스페인 출국 비행기 표를 단번에 끊어버렸다. ‘나’를 발견해보자는 명목으로 낯선 곳에서의 여행은 제격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떠나는 긴 여행의 경비를 모으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져야 했다. 우리는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밤낮으로 일을 했다. 주말이 되면 나는 레스토랑으로, 남자 친구는 돌잔치 행사장으로 향했다. 평일 밤낮을 나눠 나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들고 이불 포장 상자를 접었고, 남자 친구는 김치찌개 식당에서 서빙을 하거나 아버지의 대리기사를 하며 용돈을 챙겼다. 남자 친구는 본인을 콧수염이라 부르며 반말을 일삼는 단골 아저씨들 이야기와, 어르신들 앞에서 100일 된 아기보다 재롱을 열심히 떨었던 이야기들을 해줬다. 일과를 마친 밤이 되면 전화기 너머로 피곤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다음날에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멈춰있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일을 하는 내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고민이 끊이질 않았고, 단순 노동 만으로도 여행경비를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나 자신이 무용해지는 것 같았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내 재능은 조금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사명이라도 생긴 듯이 여행 준비를 잘하고자 했다. 지금의 무료함을 행복한 여행으로 보상받고 싶었다. 삶에서 많은 돈을 모으려고 한 적도 없었으므로, 단 한 번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환상은 당장의 불안을 잠재워 주었다. 떠나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날마다 커져갔다. 유럽여행을 다녀오면, 돈과 비교할 수 없는 재산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여행을 통해 수많은 영감들을 얻을 수 있기를,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길 바랬다. 



돈을 벌고, 여행 계획을 세우고 허무는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큰고모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오랜만에 듣게 된 큰고모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짧은 안부를 오고 간 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사실을 들었다. 큰고모가 내게 서둘러 오길 바란다고 했다. 시간을 만들어서 큰고모 댁으로 갔다. 



못 본 사이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있는 큰고모가 나를 반겼다. 안방으로 들어서니 바닥에 누워 계신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실 때 고관절과, 머리를 다치신 것 같다고 큰고모가 설명해줬다. 병원 가기를 미루고 있는 할머니 때문에 큰고모 홀로 간병 중인데 욕창이 점점 퍼져서 곤혹이라고 했다. 그런 큰고모에게 나는, 내가 돕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할머니의 손을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나를 못 알아보는 할머니에게 내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일을 가야 한다고 하고 일어났다. 큰고모는 내게 요즘 많이 바쁘냐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 말했다. 사는 게 바빠서 그렇지 뭐, 라며 대답을 흐렸다. 여행을 준비 중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 보다 작아진 큰고모를 짧게 안고는 서둘러 대문 밖을 나섰다.


일을 하는 내내 할머니의 멍한 얼굴과 큰고모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할머니 허벅지와 둔부에 깊게 파인 욕창이 떠올랐다. 그러면 나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다른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고통 중에 있는데 친손녀인 나는 여행이나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기 싫어서였다. 할머니의 죽음이 부디 유럽여행의 시기와  겹치지 않길 바랬다. 큰고모에게 할머니 안부도 자주 여쭙지 않았다.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으로 입원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만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시간은 돈이었다. 공과금과 월세 지출 때문에 모자란 여행 경비를 시간으로 메꿔야 했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가기를 미루고 미루던 중이었다. 결국 죄책감에 떠밀려 한 달 만에 할머니를 다시 보러 갔다.


요양병원으로 가는 길은 내가 자란 동네라 익숙한 거리였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거닐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내게 엄마 같은 존재였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과거에 떠올렸던 늠름한 할머니 대신, 나보다 한참 작아진 할머니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자는 듯한 할머니를 조심스레 불렀다. 할머니의 두 눈이 한참 내 얼굴을 더듬다가, 나를 알아보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가 하는 말을 거듭 다시 되물었다. 귀가 많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할머님들과 간병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큰 목소리로 재차 말하기가  부끄러웠던 나는 말을 줄였다.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었는데 그 말은 더욱이나 크게 말하기 부끄러웠다. 할머니를 일으켜 앉히고, 할머니가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몸 곳곳에 번진 욕창을 눈에 새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이었다. ‘밥을 많이 먹어야 얼른 낫지’라는 잔소리만 하며 할머니의 메마른 손을 만졌다. 


그러다 갑자기 할머니가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여기서 나가면 내가 저랬었구나, 말하기 위해’ 찍어 달라는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할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할머니의 웃음 같은 희미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할머니가 말끔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희망이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바랄 수밖에 없었다. 오래 머물지 않았다.  ‘또 올게, 일 가야 해서’라고 말하고 금세 자리를 일어났다. 할머니는 ‘어서 가, 밥 잘 챙겨 먹고’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할머니가 누워야 가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누웠고, 내가 나가는 문을 할머니가 바라보지 않을 때 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병실 문을 닫는데 문이 너무 무거웠다. 기운 없는 할머님, 할아버님들만 계신 그 병원은 무덤 같이 고요했다. 난 빠른 걸음으로 병원 밖을 나섰다. 그 이후로도 할머니 곁에 머무르기보다 떠나기를 준비하는 내 모습은 계속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례식장에서 할머니의 차가운 손을 잡게 되었다. 병원에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영원히 닫힌 할머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긴 말도 아니었다. 남 앞에서 말하기 부끄러워도 손녀라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사랑한다는 그런 말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꿈에 그리던 여행지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이국적인 풍경에 눈과 몸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하루에 30km를 걸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정교한 건축물, 상점이 즐비한 거리, 모두가 근사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바다와 절벽, 끝이 없을 것 같은 평야가 인상적이었다. 있는 힘껏 모든 순간이 내 것이 되길 바랬다. 하지만 내가 보는 풍경을 우리 할머니는 다시는 못 보리라는 생각이 밀려오면 그 어떤 것이라도 허무해졌다.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여행이었는데 나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걷고 걸어도 어디에 서있는지를 모르는 기분이었다. 떠나온 길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방법은 영영 없었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해도, 아마 나는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떠난대도 아마 우리 할머니는 나를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가 어딜 가든 무사히 다녀오기만을 바래 줬었다. 긴 시간을 떠난 적도 있었다. 내가 연락 없이 불쑥 나타나도, 할머니는 길게 묻지 않았다. 꼬깃꼬깃한 만원 지폐를 손에 쥐어주며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해줬었다. 이제는 반대로 내가 할머니의 안녕을 바라며 지내고 있다. 깜깜무소식의 기분이 이런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여행을 바쁘게 준비하고 다녀왔던 시기를 떠올리면, 마주 봤던 여행의 풍경보다 내가 등졌던 풍경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둡고 조용하던 요양병원 복도, 내가 예쁘다며 바라보던 병실 안 할머니들의 흐린 눈빛들,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던 구원에 대한 설교, 할머니가 먹다 절반을 남긴 흰 죽과 오렌지, 할머니의 희미한 웃음, 아파 보이던 곪은 피부, 나의 어려움을 이해해주려 했던 큰고모와 할머니의 등, 그런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떠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던 내 예상은 이런 식으로 맞게 되었다. 그토록 바랬던 여행을 통해 보고 겪은 근사한 것들은, 진정한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알게 되었다. 내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을. 이제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게 가장 필요를 주던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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