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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 Nov 17. 2019

그녀식 짜파게티

엄마라는 사람을 만난 건 정말 오래전 기억이다.
나이도 가늠이 안될 때인데, 아빠를 만난 바로 그 후였던 것 같다. 

아빠는 오빠와 나를 데리고 그녀에게 찾아갔다. 


명치 즈음에 오는 긴 파마머리와 어두운 선글라스를 쓴 그녀와 아빠는 별다른 대화 없이, 오빠와 나의 손을 그녀에게 넘겨주고선 담배를 뻑뻑 피다가 며칠 뒤에 보자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우리 둘을 데리고 쇼핑을 하러 갔다. 

나는 그런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고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는 그녀에게 순종적이었다. 하지만 달콤한 쇼핑의 순간은 짧았다. 긴 시간이 지나 어느 짧은 때마다 그녀를 만나면 버스를 타고 오랜 시간을 달려 그녀의 무뚝뚝한 할머니가 계신 외가댁에 가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시골집에서 머물거나 해야 했다. 장작을 넣어 아궁이에 불을 때야 하는 어두운 시골집에 오빠와 나를 두고 그녀는 종종 안 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짐이 된 걸까. 낯선 곳에서 오빠와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을 더 오래 견뎌야 했다.


한 번은 저녁에 그녀가 오빠와 나에게 짜파게티를 해줬다. 국물이 아주 많은 짜파게티를.
그녀는 짜파게티 만드는 법을 몰랐는지, 신라면과 다름없게 짜파게티를 우리에게 내놓았다.
오빠는 이건 짜파게티가 아니라며 짜증을 냈고, 잔말 말고 먹으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휘적휘적, 국물에서 면을 건져냈다. 뽀얀면은 아직 다 익지도 않아서 입안에서 꼬드드득 씹혔다. 내가 먹어 본 라면 중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라면이라고 생각하며 허기진 뱃속으로 면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셋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헤어져, 각자 흩어진 삶을 살았다.

시간이 지나 볼에 여드름 자국이 붉은 사춘기가 되었다. 어느 날은 짜파게티를 끓이려다가 평소 신라면을 끓이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짜파게티 수프를 한강 같은 물에 부어 버렸다. “아! 젠장” 짜증이 났지만 돌이 킬 수 없었다. 수프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순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큰 찌개 냄비에 세숫물처럼 가득 담긴 거무죽죽한 국물과 뽀얗던 면발. 그녀가 끓여 줬던 세상에서 제일 맛없던 라면.

무슨 생각인지, 나는 팔팔 끓고 있는 거무죽죽한 국물에 면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면발이 퍼지지 않을 때 즈음,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휘적휘적 저어, 뽀얀 면발을 입에 욱여넣었다.

내가 먹어본 라면 중에서 우주 최고로 맛없는 라면이었다. 짜증 나는 맛이었달까.
어릴 때 그녀가 끓여준 맛이 아니었다.

그녀가 끓여준 어설프지만 꼬들꼬들하고 씹을수록 구수했던 짜파게티 맛이 아니었다.
그 짜파게티가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라면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때의 그 라면 맛이 그리워지는
이 아이러니함을 무엇인가 생각하며, 짜파게티를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녀는 대체 나에게 해준 것이 뭔가, 라면 하나도 제대로 못 끓여 줬으면서.
나는 이렇게 싸질러 놓고서, 그녀가 아니 그 사람이 어딘가에서 두 발 뻗고 편히 잠잘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시절 나는 그녀에 대한 분노와, 기대 그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늘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텔레비전의  사각 프레임  속 엄마, 아빠, 자녀들이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과일을 먹는 장면을 보면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다 사각 프레임 장면 속에 우리의 얼굴을 넣어보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히 넣어보려 해도 식탁에 앉은 그녀의 눈은 언제나 선글라스로 가려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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