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도착해서도 곧장 있을 예배와 선교활동에 대한 피드백으로 인해 밤늦게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캐리어 속에 일주일간 빨지 못한 케케묵었던 옷들을 꺼내자 왠지 만화에서 나오는 듯한 초록색 갈색이 뒤엉킨 이미지의 냄새가 꼬릿 하게 풍겼다. 난감한 이 냄새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세탁기, 세제, 섬유유연제!’ 인류의 발명품을 찬양하며 빨랫감들을 세탁기에 쑤셔 넣었다. 빨래를 정리하자 초록 냄새 풍기던 방안이 뽀송뽀송 쾌적해진 것 같았다. 흐뭇한 마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드득 씻어보질 못했던 일주일이었다. 샤워기에서 물이 터져 나오며 따듯한 물이 몸을 적시자 온몸이 기분 좋게 부르르 떨렸다. 깨끗한 물, 따뜻한 물, 청량감 있는 샴푸들이 내 살결에 어우러지는 순간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묵힌것들을 한순간에 개운하게 씻어 버릴 수 있구나”
곧이어 머릿속에 인도네시아 잠비주 오지에서 만난 아이들과 주민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누군가 발로 짓밟아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될법한 더럽고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살아본 적이 없는 그들은 3살짜리 여자 아이 발에도 굳은살이 딱딱하게 배겨있었다. 아이들의 긴 속눈썹 위로 모여 앉은 날파리들은 시골 농장에 가면 맡을 수 있는 닭장 냄새, 비료 냄새를 그들에게서 맡고 모여든 것 같았다.
샤워를 하며 느낀 개운 함이라는 기분은 마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것처럼 새삼스럽게 감사하고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욕조에 담아 놓고 일주일간 나눠 쓰기 위해 물을 아껴 써본 적이 없다. 씻으면서도 물이 입에 들어가면 병균에 감염될까 봐 입을 꼭 다물고 씻어본 적도 업다.
똑같은 옷을 매일 반년 내내 입을 일은 고사하고, 구멍 나고 세균 흙더미에 오염된 옷을 입고 살아 본 적도 없다.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장 오지의 숲 속에서 그들과 함께 지낼 때 그들에게서 삶에 대한 꿈과 에너지를 발견할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나의 부족하고 모난 마음을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서 희생을 배웠다.
그들의 열악한 삶의 현장을 연민이 아닌 개선시킬 수 있는 도움과 공감으로 다가갈 방법들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그들과 직접 살고, 부대낀 덕분에 많은 걸 알 수 있었음에 소박한 뿌듯함도 있었다.
하나 아무리 그런들, 체험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는 간과 했다. “내가 그곳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새롭게 다가왔다.
내게 주어진 삶의 방식과 환경으로만 보자면 그들에 비해 난 수천 배 편한 환경에 살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인류의 발명품, 개운함, 뽀송뽀송, 쾌적을 누릴 수 없는 환경에 살고 있다.
그들의 삶과 내 삶을 견주어 내 삶이 더 낫기에 감사하다는 감상에 젖는 것을 정말 싫어하지만,
난 유독 감사함을 잊고 살고 있었다.
인스타그램 속 나보다 나아 보이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주변 사람들과, 둘러보기 속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나도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꿈꾸며 속이 끓었다. 내가 잊은 게 뭔지도 모른 체 부러워하고 있던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능력치가 다르듯, 숲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그들의 능력치대로
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 나도 나름대로 자-알 살아왔다. 또 많은 걸 이루고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을 난 간혹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남들과 나를 비교한다.
나무의 보이는 부분만 보고 나무 전체를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나무 전체의 영양분을 흡수해 자라기 때문이다.
사람도 나무와 같이 겉모습은 보이는 육체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과 정신을 어떻게 키워내냐가 중요하다.
내 삶을 남에게 견주는 것은, 그것이 자격지심이든 감사함이든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그 생각보다는 어떤 마음과 선택으로 살고 희생을 견디고, 사랑을 흘려보내며 살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는 내게 주어진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분별하며 살 수 있길 가슴 깊이 바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를 일으켜 다른 이에게 걸어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