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린 탑지기,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어느 날 다른 밴드의 친한 형이 술자리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야, 너네는 다 좋은데 그 이름은 좀 바꾸는 게 어떻겠냐?"라는 말을 했다. 자신이 홍대에서 지금껏 여러 밴드들을 봐왔는데 실력에 무관하게 상당수의 밴드들이 결국 그 이름대로 가는 걸 많이 보았기에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는 '뉴클리어 이디엇츠(핵바보, 심하게 말하면 핵병신)'라는 밴드명이 우리의 운명을 나쁘게 결정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게까지 우릴 신경 써주는 마음도 고마웠고, 우리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이름을 바꿔보자는 취지로 밴드 내부에서 몇 차례 회의를 하긴 했으나, 이미 이름에 너무 정이 들어버린 탓일까. 결국 우리는 아직도 '뉴클리어 이디엇츠'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고,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이름에 우리의 운명이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 게, 문화 속 많은 분야에서 의외로 많은 프랜차이즈나 작품들이 그 제목을 따라가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이기는 한다. 그리고 그중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안 그래도 표류하던 프랜차이즈의 '운명'에 말 그대로 '어두운 종지부'를 찍어버린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이다.
영화 '터미네이터 2'의 기념비적인 성공 이후, 3편부터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극단적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따로 떼고 보면 비교적 준수한 영화이기는 하나 2편의 열화된 버전의 동어반복에 불과했던 '터미네이터 3', 암울한 미래 전쟁을 그리려는 시도 자체는 좋았으나 이도 저도 아니었던 느낌의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좋게 봐줘도 실패한 미드 파일럿 프로그램 수준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조악한 퀄리티를 보여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까지 그 질적 하락은 꾸준하면서도 점차 가팔라지는 양상을 보였다. 그랬기에 프랜차이즈의 팬들은 아예 2편 이후로는 정사에 포함시키지 않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수준미달의 속편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시리즈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제임스 카메론의 복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터미네이터 1편을 제작할 당시에 돈 없고 빽 없는 메이저 영화감독 지망생에 불과했던 제임스 카메론은 여기저기 힘들게 수소문한 끝에 자신의 각본과 아이디어로 영화를 만들 제작사를 겨우 찾기는 했으나, 그 대가로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판권을 넘겨야만 했다. 그 행동이 발단이 되어 3편부터는 본인의 손으로 일궈낸 프랜차이즈에 창작자 본인이 손댈 권리가 없는 웃지 못할 희한한 상황이 얼마 전까지 쭉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 상황은 2017년 즈음에 그가 터미네이터에 대한 저작권을 되찾아오겠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결국 그는 2019년작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제작에 참여하는 것이 확정되었고 판권 역시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면서 팬들은 다시금 시리즈에 희망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팬들이 원하던 대로 제작진은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2편 이후의 모든 속편들을 무시하고 프랜차이즈의 역사를 수정하고 새로 써 내려가겠다고 선언했고, 그에 대한 기대감은 꽤 크게 올라갔다.
그가 직접 감독하는 것도 아니고 제작에만 참여할 뿐인데 뭐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비슷한 사례로 그가 '제작에만 참여한' 작품 '알리타: 배틀 엔젤'은 호불호는 갈리기는 했으나 적어도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를 좋아하던 이들에게는 그의 손길과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 준수한 작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아바타 시리즈에 묶여있기에 그가 직접 감독까지는 하지 못해도, 그의 성의와 열정으로 죽어가는 프랜차이즈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 많은 팬들이 신뢰를 가졌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신뢰가 절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영화가 시작한 이후 불과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터미네이터 2' 이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의 어린 존 코너가 새로 나타난 터미네이터의 총구에 가슴이 뻥 뚫려 죽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아, 사라 코너의 꿈이겠지?' 생각했는데 오프닝 크레딧이 다 지나간 시점에 이에 대한 아무 언급도 없이 영화가 진행되는 걸 보고 "뭐야, 진짜였어?! 미친!"이라고 육성으로 내뱉을 뻔했다. 기존 팬들과 2편 이후의 속편을 만든 이들이 존 코너의 서사에 얽매이기만 했기에 시리즈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생각에 의해 내린 과감한 결단이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경우였다면 이 충격적인 오프닝 씬 이후에 뭔가 납득할 만한 참신하면서도 뛰어난 전개를 보여주었어야 하나, 영화가 선사하는 것은 단순히 인류의 구원자를 존 코너에서 인종과 성별만 바꾼 다른 인물로 전환한 뒤에 미래에서 한 명은 그를 죽이러 오고, 다른 한 명은 그를 보호하러 온다는 1편부터 (4편은 제외하고) 반복되어 온 진부한 서사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뿐이다.
물론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에 새로 더해진 부분도 없지는 않다. 바로 2010년대 후반부터 지리멸렬하게 반복되어 온 '요즘의 헐리우드식 페미니즘과 다인종주의'이다. 새로 설정된 인류의 구원자는 히스패닉 여성이고, 그를 보호하러 미래에서 온 강화인간 역시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사라 코너는 1편에서는 쫓기는 히로인, 2편에서는 액션 영웅으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한 여성 액션 히어로의 현대 영화 역사상의 모범적 사례였으나, 여기에서는 "여성은 본인 스스로보다 자궁 제공자로서 더 가치가 있다."라는 류의 망언이나 내뱉는 꼰대로 그려지며, 시리즈가 전개됨에 따라 무시무시한 살인기계이자 악당에서 인간미를 배운 영웅으로의 변화를 보여준 터미네이터 역의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존 코너를 죽인 장본인임에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방구석에 앉아서 농담 따먹기나 하는 늙은 개그캐릭터로 전락한다. 미래에서 온 보호자 그레이스는 늘 화가 나있고 기존의 가치나 나이 든 캐릭터에게는 무조건 화내거나 비웃기만 하는 전형적인 요즘 스타일의 여성형 히어로다. 존 코너를 초반부에 죽이면서까지 새로운 인류의 영웅으로 설정된 캐릭터 다니엘라 라모스에게는 어떠한 위엄도 매력도 느껴지지 않으며, 중후반부에 잠깐 등장하는 미래 씬에서 분명 전쟁통의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용실에서 3시간은 세팅한 듯한 파마머리로 발연기를 펼치는 주연배우 나탈리아 레이스의 모습을 보면 헛웃음을 넘어 진정한 분노가 느껴지게 된다.
한 가지 오해를 방지하고자 이야기하면 나는 절대로 영화에 다인종주의나 페미니즘의 요소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영리하게 영화의 플롯에 잘 녹아들어 가기만 한다면 인종 차별이나 성 평등에 대한 유의미한 메시지를 담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이는 가산점을 받아야 할 것이다. '고스트버스터즈 리메이크(2016)'를 제외하면 난 폴 페이그가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유머에 녹여내는 방식이 뛰어난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노골적인 표현 방식이 다소 유치한 부분은 있지만 '에놀라 홈즈' 역시 나름의 매력을 갖춘 시리즈 영화라고 본다. 헐리웃 영화에 더 많은 흑인이나 히스패닉, 동양인 및 기타 인종이 주요한 배역을 맡는 것, 영화에 동성애자나 범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 등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다. 내가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헐리웃에서 이러한 PC(정치적 올바름) 요소를 플롯이나 캐릭터에 성의 있게 녹여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피상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만 보여주기식으로, 요약하자면 굉장히 싸구려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데에 있다.
현대 헐리웃의 창작물에서 여성 히어로는 그 어떤 서사나 갈등 구조 및 성장도 없이 무조건 남자보다 강해야 하고, 남성 히어로나 기존의 기성세대의 가치는 무조건 조롱 및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몇몇 캐릭터들은 마치 할당제라도 있는 것처럼 몇 분에 한 번씩 "아, 여러분이 모를까 봐 얘기하는데 사실 저는 게이입니다."라는 류의 대사를 내뱉어야 한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동양인의 출연 빈도는 늘었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흑인 캐릭터는 정체불명의 과장된 아프리카식 악센트로 이야기해야 하고 히스패닉은 늘 가난하며, 동양인은 항상 무술을 하고 가라오케를 좋아해야 하는 이상한 클리셰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안일한 구상과 억지스러운 헐리웃식 PC가 합쳐져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남성 중심 구원자를 대변하는 캐릭터 존 코너는 시작 몇 분만에 처참하게 찢어발겨지고, 퇴장하지 못한 캐릭터들은 타락하거나 망가지며, 매력 없고 서사도 부족한 이들이 단지 여성이거나 다른 인종이라는 것을 무기로 삼아 그 자리를 채우고 러닝 타임 내내 관객과 팬들에게 시종일관 액션은 화려하게 펼쳐지는데 보고 있는 이는 지루하고 재미가 없게 느껴지는 인지부조화를 안겨준다.
어쩌면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망가져가는 시리즈를 놓지 못하고 뒤돌아서지 않는 팬들에게 원작자 제임스 카메론이 '제발 떠나가라'며 놓아주는 강력한 불주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가 '에바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졸업을 선언하며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II'으로 시리즈를 끝장냈듯이, 제임스 카메론 역시 판권도 없던 시절부터 끊임없이 자신에게 "터미네이터 속편 좀 만들어주세요."라고 떼쓰듯이 다가오는 팬들에게 질렸을지도 모르며, 터미네이터 이후에도 항상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터미네이터로 돌아오기를 조르는 영화계에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호불호는 갈려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II'은 좋은 작품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에는 칭찬할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그래도 다크 페이트가 터미네이터 2 이후의 다른 속편보다는 낫습니다."라고 하는 이들이 꽤 있는데 진지하게 대체 뭐가 나은 건지 묻고 싶기도 하다. 액션은 화려하기는 하지만 알맹이가 없고, 연기는 '제니시스'보다는 낫지만 캐릭터 서사가 엉망이기에 의미가 없으며, CG의 퀄리티는 여전히 조악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낸 공든 탑을 무너뜨릴 권리는 제임스 카메론에게밖에 없었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끝장내버려야 한다'라는 사명을 행한 것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에이리언 3'가 개봉했을 때 뉴트의 죽음에 대해 "팬들에게 이런 배신감을 선사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한 비판 의견을 보였던 그가 몇십 년이 지난 후에 "존 코너를 시작하자마자 30초 만에 죽이자고 내가 제안했다. 재미있지 않나?"라는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깊은 씁쓸함만이 느껴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