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lie Brown Christmas OST
예술을 창작하는 이에게 가장 큰 좌절감이 찾아오는 순간은 언제일까? 오랫동안 내 작품이 인정받지 못할 때, 온 힘을 쏟아낸 역작이 대중에게 외면받을 때, 소소하게는 내가 만든 작품을 의뢰한 클라이언트가 좋아하지 않거나 거절할 때 등 다양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창작자에게나 가장 큰 혼란과 두려움이 오는 순간은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평가가 나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걸 자각하는 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온 힘을 다해 만들어낸 야심작은 대중에게 외면받을 수도 있는 반면, 대충 흘러가는 대로 만들어서 시간에 맞춰 급하게 내놓은 작품은 또 의외의 대성공을 거둘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창작자는 작품이 성공했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심하게는 모든 것을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에 놓인 듯한 느낌에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나같이 대충 취미 겸 부업으로 음악하고 글 쓰는 사람일지라도 온 힘을 다해 쓴 글은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데, 별생각 없이 쓴 글이 알 수도 없는 원인으로 조회수가 폭증한다거나 하는 상황이 생기고 우리 밴드의 음반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은 사람들이 듣지 않고, 상대적으로 그다지 애정이 없는 곡은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공연의 주 레퍼토리가 되는 상황이 생기면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다음 작품은 어떻게 작업해야 하나 고민이 생길 때가 있다. 하물며 이를 주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수 차례 공황상태에 빠져 결국 정신과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1965년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리 멘델슨은 만화 '피너츠'의 작가 찰스 슐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스폰서를 찾고 있던 중에 코카콜라 사로부터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게 된다. 바로 CBS에서 방송될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 스페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애니메이션과는 딱히 연이 없는 그였지만 작가 찰스 슐츠에게 연락하여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급하게 초안을 완성하고, 소개받은 애니메이터 빌 멘델레즈와 함께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 와중에 당시 애니메이션으로서는 파격적일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데 해당 만화의 사운드트랙을 당시 젊은 재즈 뮤지션이었던 빈스 과랄디에게 맡긴 것이다. 지금도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의 OST에 성인용 재즈가 들어가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인데 당시에는 거의 최초였을 것이다. 겨우겨우 작품을 제 시간 안에 완성해 방송사에 제출한 그들은 CBS의 간부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듣게 된다. 내용의 기승전결은 엉망이고 결말은 안티클라이마틱한데다가 성우들의 음성 녹음이나 디테일한 부분에서도 질적으로 떨어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애니메이션 자체도 문제였지만 간부들이 제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은 바로 문제의 음악이었다. 가뜩이나 우울한 분위기에 빈스 과랄디의 재즈 음악을 얹으니 도저히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라고는 보기 힘든 괴작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스케줄은 정해져 있었고 이제 와서 수정은 불가했기에 해당 작품은 원래 예정된 시간대에 그대로 방영될 수밖에 없었고, 핵심 크리에이터였던 멘델슨은 머리를 싸매고 자신이 피너츠를 망쳤다며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시청자들의 심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대반전이 벌어졌는데 막상 방영이 되고 나니 해당 애니메이션이 초대박을 치고 만 것이었다. 이전에 없던 독특한 분위기의 만화에 성인층과 어린이들 모두가 열광했고, 결국 당시 에미상을 수상하고 멘델슨과 멘델레즈는 아예 공식적으로 회사까지 설립하며 찰리 브라운 애니메이션의 공식 크리에이터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러한 열광을 이끌어내는 데에 가장 크게 공헌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간부들이 가장 싫어했던) 빈스 과랄디의 전례 없는 애니메이션용 재즈 사운드트랙이었고, 해당 앨범은 전 세계에서 가장 히트한 크리스마스 음반 중 하나로 아직까지도 매해 꾸준히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나는 어릴 때 잠시 미국에서 거주하던 시절에 VHS로 이 애니메이션을 접했는데 당시 어렸던 나에게도 이 작품의 음악만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고, 내가 시청하고 있을 때마다 지나치며 곁눈질로만 이 만화를 보셨던 부모님마저도 이 앨범의 노래가 재생될 때면 "어? 이거 그 스누피 거기 나온 노래 아니야?"라고 하실 정도로 해당 음반은 듣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나는 사실 어릴 때는 이 작품을 많이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간부들의 의견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인이 되어 다시 보면서 작품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이 만화는 사실 망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인 부분이 많다.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찰리 브라운이 어찌어찌해서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다가 어쩌다 보니 크리스마스 연극의 감독을 하게 되었는데 이래저래 다 망치고 비난받다가 이러쿵저러쿵 해서 친구들이랑 그럭저럭 하고 잘 놀고 대충 끝났습니다." 같은 이상한 내용이 되어버린다. 문제의 크리스마스 연극의 실체는 끝까지 등장하지도 않고, 어떻게 친구들과 다시 화해하게 되었는지의 과정도 두리뭉실하며 뭔가 함축된 메시지(크리스마스의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 등)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명확하지도 않고 결말도 애매하다. 심하게 보면 안노 히데아키의 '에반게리온'이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의 괴이한 후반부 전개의 서양 어린이용 버전 같은 느낌 같기도 하다(그러고 보니 이 작품들도 호불호가 매우 갈리지만 엄청나게 히트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이 만화에 개인적인 추억이 많고 여전히 이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 해당 앨범을 들을 때면 미국에서 거주할 당시 크리스마스 무렵에 집 뒷문을 열면 수북하게 쌓여있던 흰 눈, 부모님과 주변에 살고 있던 친척 형, 누나들이 날 위해 준비한 선물들과 그것들이 놓여있던 크리스마스트리가 생각난다. 2층짜리 건물의 반칸씩만을 쓰는 작은 집이었지만 크리스마스 날만큼은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커 보였던 것 같은 어릴 적의 기억이 아직도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만들어낸 작품, 망했다고 생각했던 창작물이 생각지도 못한 히트를 했을 때 기분이 좋을 수도, 안도감이 들거나 역으로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품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거기에 추억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만한 대단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 역시 창작자를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줄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공지사항*
2023년 한 해 동안 많은 글을 쓰고 연재했습니다. 브런치의 음악 분야 크리에이터로 선정되기도 하고, 업로드한 글 중의 약 70%가량을 올 한 해에만 썼으니 나름 글쓰기에 충실했던 한 해를 보낸 것 같기도 합니다.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나름 스스로 스케줄을 정하고 최대한 열심히 했으나 요 근래에 들어 저의 글쓰기에 미숙한 점, 부족한 점을 느끼게 되었고 제 생업과 개인사, 음악 작업 등과 병행하기에 현재의 페이스로는 조금 무리가 있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연재 중이던 '마이 피지컬 로맨스' 시리즈는 이번 화로 마무리하며, 나머지 매거진 역시 모두 비정기 연재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올 한 해 남은 일정 동안은 새로운 글 업로드는 없을 예정입니다.
대신에 내년 초에 준비가 되는 대로 새로운 주 1회 정기 연재 시리즈로 찾아뵙겠습니다. 음악 에세이에 가까운 내용으로 구성될 예정이며, 매주 지금보다 더욱 글 하나하나에 성의와 신경을 더 쏟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