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날숨으로
지난 TV 개그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던 인물 중의 하나인 ‘영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듣기만 하여도 미소를 짓게 되는 이름이다. 콩트를 하기 위해 등장하며 ‘영구 없다’를 외치는 이 심오한 의미를 그땐 미처 몰랐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무상의 덧없음을 말한다. 고정된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붓다는 몸과 마음의 배후에 불변하는 부동의 실체를 가정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자아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우리가 소위 자아라고 하는 관습적 실재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이루어진 오온(五蘊)의 구성으로 설명한다. 몸에 해당하는 색은 물질을 의미하고 정신(마음)에 해당하는 나머지 4가지, 수는 느낌(감각), 상은 인식(생각), 행은 행위(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반응 등), 식은 의식을 뜻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이라는 이 개체성이란 끊임없이 흐르는 물질들의 무더기, 오온일 뿐이다. 이 물질의 흐름에 하나의 개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자아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어 있는 에너지의 집합이기도 하고, 그 에너지가 불러일으키는 ‘생각 또는 나’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
무아나 무상의 의미는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고 없던 것에서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의 소멸에 의해 사라지는’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표현하는 말이다. 마음은 조건에 따라 움직인다. 느낌과 감정은 조건이 되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느낌과 감정은 결과이기도 하다. 자연이란 조건에 따라 조합되고 뒤섞이는 변화의 흐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무아란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100일마다 생성과 소멸을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있으며,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60개 조의 세포 안에서 끊임없이 변이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잠이 들면 생명활동은 계속되고 있지만, 수면의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의식이 전혀 없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전신마취를 하게 되면 두뇌에서의 전기신호는 거의 없으며, 우리의 의식도 사라진다. ‘내가 나라는 느낌’을 만들어 주는 우리의 의식은 영혼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던, 두뇌의 전기적 신호의 연결에서 나오는 것으로 뇌과학은 설명한다. 마음의 작용과는 별개로 우리가 느끼는 의식이라는 것은 두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아의식은 신체의 통합된 신경 프로세스의 결과물 일 뿐이다. 실험에 의하면 두뇌의 섬엽 부분에 자기장을 걸어 활동을 정지시키면 자아의식이 사라지고, 자신의 사진을 보고도 자기 인지도 모르는, 자아의식이 동반되지 않는 인지가 발생한다.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위와 같이 설명하는 무아라는 단어를 접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내가 없는데’ 무엇을 관찰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무언가 있어야만 할 것 같고 무언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우리의 관념이 없음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게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무아라고 하고 무상이라고 하면, 있던 것이 사라진다고 하는 공포로 당황스러워한다. 무아에 대해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나’ 또는 ‘자신’이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현상으로서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재로서의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개체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고정된 실체를 상정하거나, 이것을 자기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은 인지습관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불교의 4대 경장의 하나인 상윳따 니까야에는 ‘세상 모든 것은 불타오르고 있으며, 세상 모든 것은 화염에 휩싸여 있으며, 세상 모든 것은 작렬하고 있으며, 세상 모든 것은 떨리고 있다(S5:7)’고 한다. 현대 양자 물리학에서도 물질의 근원은 우리가 보고 있는 빛조차도 입자인 동시에 파장인 단계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관찰자 효과라는 것은 무엇인가 있을 거야 하는 존재관념이 물질로 하여금 파장을 입자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겉모습은 관찰자의 의식의 프레임(색안경)을 통해 그렇게 보여질 뿐 실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나라고 하는 프레임이 지워져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