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오늘도 탈출 중)
오늘은 이상하게, 모든 게 내 탓 같았어. 세탁기가 멈춘것도,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며 나를 안 쳐다본 것도. 심지어는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느라 출발하지 못한 7612 버스를 향해 후다닥 뛰어가 간절한 눈빛으로 기사아저씨를 바라봤는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출발해 버린 버스의 뒷꽁무니를 보며 오만가지 생각에 약이 오르기도 했지. 근데 생각해 보니, 그냥 세탁기는 오래됐고, 선생님은 긴 강의에 피곤했을 뿐이고, 버스는 시간에 쫓겨 제때 출발했을 뿐인데 말이야. 결국 상황은 다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하던데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문제는 그 원인이 나일 수도 있다는 게 좀 짜증 나지만 말이야. 그래서 오늘은 탈출을 시도해 봤어.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냥 반응 안 하는 걸로. (이게 나름의 엑소더스야. 돈도 안 들고, 눈에 띄지도 않거든.) 누가 뭐라 해도 그냥 “음, 그렇구나.” 하고 말해봤더니 기분은 좀 찜찜했지만 내 말에 내가 덜 흥분하더라. 그러니까, 탈출은 ‘자세의 문제인 거야. 가식적으로라도 그냥 웃어보는 거지. 뇌가 얼굴 근육의 움직임에 속아 행복하다고 착각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그렇게 된다잖아. 그래서 그런지, 웃다 보면 부러운 마음도 잠시 쉬는 것 같더라. 요즘은 아픈 사람들을 보면 괜히 더 챙기려고 해 왜 그런진 모르겠어. 아마 나도, 같이 아프면 좀 덜 외로운가 봐 이 느낌’이라는 건 도무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냥 놓아보려고 해. 무시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괜히 들키면, 내가 잘난 사람으로 오해받을지도 몰라. 그건 더 불편하잖아. 오늘도 탈출 중인 멍청하지만,가끔은 쓸모 있고 싶은 너의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