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경제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 나는 아이러니하다. 일전에 어떤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교육하는 영상을 봤다. 반을 국가로 규정했다. 반 안에서만 통용되는 화폐가 존재하고 학생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다. 초등학교 6학년이 세금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으며 회의에서는 세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복지나 운영 방안을 주제로 토론한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어떤 날은 선생님이 세금을 횡령하기도 했다. 인플레이션이 적용되고 물가도 변동이 된다. 그 아이들의 경제 지식은 25살 시절에 내 모습보다 뛰어났다. 내가 초등학교 때 적어 내던 진로 희망서의 변호사나 과학자, 대통령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은 자신이 적는 직업에 대해 더 분명히 인지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돈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을 깊게 공부하지 않는다. 초중고 교육 수준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우리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나 경제지표나 환율에 관한 내용을 배우지 못했다. 청약이 집과 관련된 것임을 알지만, 어린 친구들은 부동산을 잘 모른다. 그냥 내 명의에 집이 있으면 좋은 것으로 생각할 뿐. 신축에 깨끗한 집이 좋다고 생각하는 청년이 많다. 정작 저평가된 낡고 변방에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부자들이 모두 구매한다. 투자적인 구매가 아니라 해도, 향후 이사를 하거나 더 큰 집으로 옮길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고려해야 하는 부분임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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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조금 이상하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 수입원이 있다. 그중에는 월 19달러 정도에 파이프라인 즉 비노동 수입이 있다. 글을 쓰는 시점 환율로 대략 25,400원 정도 되는 돈이다. 친구에게 이 수입원에 관해 이야기하자 친구는 ‘하루도 아니고 30일에 2만 5천 원이면 귀찮게 할 필요가 없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돈이 크지 않은 액수라는 것에는 나도 동감한다, 하지만 이 돈을 버는데 노동력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 이상으로 큰돈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현재 특정 은행의 일반 적금 금리가 3%다. 1년짜리 적금으로 월 185만 원을 저축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연 세전이자는 360,750원이다. 여기서 세금 15.4%에 해당하는 55,556원을 빼고 12개월로 나누면 25,432원. 내가 받을 수 있는 월 이자가 된다. 사회초년생의 세후 급여를 적금으로 그대로 때려 넣어야 얻을 수 있는 이자라는 소리다. 그리고 친구는 185만 원이라는 숫자를 듣고 나서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잘 사는 나라가 맞지만, 경제력에 비해 금융문맹률이 상당히 높다. 직설적으로 돈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이다. 젊은 세대가 퇴근 후 부업을 하고, N잡이 흔해지고, 비혼주의와 비출산을 선택하는 것이 늘어나는 이유는 결국 돈이다. 현실도 흔들리는 와중이니 사람들은 꿈을 내려놓는다. 그런데 정작 돈을 공부하는 인구는 많지 않다. 그나마 미디어의 발달로 관련 채널들이 쏟아지니 그 비율이 조금 오르는 것은 다행일 수 있다. 거짓 정보와 사기꾼들이 없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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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문장이 아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없다. 이를 조금 더 풀어 이야기하면 지나갈 예정인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 나의 시간을 위해 타인의 시간을 돈으로 구매하는 것. 그것이 고용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단순히 연차가 쌓이고 진급해서 급여가 오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는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이 쌓였기에 나를 고용하는 비용 즉 몸값이 오르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분명 과거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았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환경에 있다. 문제는 평균적인 수준보다 평균적인 눈높이가 너무 높아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절실함은 부족한 세대가 되어버렸다. 진짜 가난을 모르는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가난을 겪지 못했다. 어렴풋이 짐작할 뿐. 하지만 이로 따라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절실하지 않기에 충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력이라는 단어의 가치가 하락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이 내용에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나로 인해 기분이 나빠진다면 사과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반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같이 우리가 하는 노력이라는 단어의 가치를 높이고,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눈높이를 낮추고 잘 살고 싶은 것일 뿐이다. 내 친구들이 선입견 혹은 색안경을 부수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통찰하고 계산하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