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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4시간전

엘리엇 힐의 순간 : 영혼

엘리엇 힐 나이키 CEO는 그때 나이키에 인생을 바치기로 선택했다. 

1988년 엘리엇 힐은 NFL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엘리엇 힐은 1988년 나이키의 저스트 두 잇 광고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80세의 할아버지가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건너는 장면이었다. 메시지는 단순명료했다. 그냥 해. Just Do It. 엘리엇 힐은 당장 나이키에 입사 지원서를 낸다. 엘리엇 힐은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에서 운동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오하이오 대학교에서 스포츠 마케팅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엘리엇 힐은 오하이오 대학교에 강의를 하러 온 나이키 마케팅 관계자를 6개월 넘게 쫓아다녔고 결국 인턴 자리를 얻게 된다. 그것이 나이키와 힐의 34년 인연의 시작이었다. 엘리엇 힐이 24세 때였다.


엘리엇 힐은 진심으로 스포츠를 사랑했다. 농구와 미식축구의 광팬이었다. 무엇보다 엘리엇 힐은 팀스포츠를 사랑했다. 엘리엇 힐은 스스로를 소프츠 마케터이기 이전에 스포츠맨이라고 여겼다. 엘리엇 힐이 입사 3년째인 1991년부터 2000년까지 나이키의 팀 스포츠 부문에서 경력을 쌓은 건 어찌보면 숙명적인 것이었다. 팀 플레이어가 팀 스포츠 부문에서 팀 스포츠 제품을 마케팅했던 것이다. 엘리엇 힐은 우리가 이기면 내가 이긴다고 외쳤다. 실제로 팀 나이키는 1990년대 급성장했다. 엘리엇 힐은 입사 10년 만에 팁 스포츠 부문장이 됐다. 


무엇보다 1990년대는 나이키의 전성기였다.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가 NBA에서 첫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게 1991년이었다. 나이키는 1984년 마이클 조던과 처음 광고 계약을 맺었다. 1980년대 NBA를 대표하는 선수는 마이클 조던이 아니라 매직 존슨이었다. 나이키의 선택은 마이클 조던이었고 그것도 전부를 거는 도박을 했다. 


사실 나이키는 1979년 이미 매직 존슨한테 차인 적이 있었다. 매직 존슨은 나이키 대신 컨버스를 선택했다. 나이키로선 마이클 조던만큼은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나이키 공동창업자 필 나이트는 나이키의 마케팅 예산 25만 달러를 몽땅 마이클 조던에게 지불했다. 필 나이트와 나이키는 5년 250만 달러의 스폰서쉽 계약을 맺었다. 1985년 4월 1일 출시된 레드 앤 블랙 디자인의 에어 조던1은 1985년 연말까지 1억 달러의 수익을 냈다. NBA가 레드 앤 블랙 에어 조단 디자인을 금지하자 나이키는 경기당 5000달러의 벌금을 대신 내주면서 마케팅을 했다. 


그렇지만 나이키가 경쟁사인 컨버스를 제치고 농구 코트를 지배하기 시작한 건 1991년 시카고 불스가 NBA 파이널 정상에 오르면서부터였다. 1991년 NBA 결승전은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의 정면 승부였다. 동시에 마이클 조던의 후원사 나이키와 매직 존슨의 후원사 컨버스의 결승전이었다. 


1991년 6월 2일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 선수들은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시리우스를 배경으로 홈그라운드 경기장인 유나이티드 센터에 입장했다.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시리우스는 지금까지도 시카고 불스의 입장곡으로 쓰이는 시그너쳐다. 1차전은 마이클 조던과 나이키의 패배였다. 마이클 조던은 경기 종료 직전 5.5미터 장거리슛을 던졌지만 실패했다. 시카고 불스는 LA 레이커스에 91대 93으로 졌다.


2차전은 마이클 조던과 나이키의 승리였다. 마이클 조던은 경기 종료 8분을 남기고 자유투 라인에서 점프했다. 오른손 덩크슛을 시도하다 수비 블록킹에 막히자 왼손으로 공을 넘겨서 레이업슛을 성공시켰다. 전설적인 더 무브였다. 이때부터 경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승부근성이 넘치다 못해 미치는 마이클 조던이 더 무브 이후 노골적으로 LA 레이커스 선수들을 조롱했기 때문이었다. 시카고 불스 동료들조차 그런 조던을 불편해할 정도였다.


3차전은 나이키와 컨버스의 승부처였다. 마이클 조던은 3차전 4쿼터 2점 뒤진 상황에서 3.4초를 남기고 2점 점프슛을 성공시켰다. 마이클 조던은 경기를 연장전까지 끌고 갔고 결국 시카고 불스가 이겼다. 이 모든 순간을 당시 나이키의 팀 스포츠 부문 팀원이었던 엘리엇 힐은 현장에서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엘리엇 힐을 감동시킨 순간은 따로 있었다. 1991년 6월 12일 5차전이었다. 혼자 힘으로 경기를 끝내고 싶어했던 마이클 조던은 자꾸만 단독 드리블을 반복했다. 당연히 LA 레이커스의 수비에 번번히 막혔다. 그런데도 마이클 조던은 오픈된 동료 존 팩슨을 무시하고 무리한 단독 공격을 반복했다. 필 잭슨 시카고 불스 감독은 작전 타임 때마다 마이클 조던에게 “방금 누가 오픈이었지?”라고 다그쳤다. 필 잭슨의 눈을 계속 피하던 마이클 조던도 결국 “팩슨”이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마이클 조던에게 패스를 받은 팩슨은 5차전 마지막 4분 동안 5개의 슛을 성공시켰다. 우승이었다.


이 순간은 나중에 일본 만화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에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강백호에게 패스하는 서태웅의 선택으로 오마쥬된다. 시카고 불스 입단 7년 만에 생애 첫 NBA 우승을 이룬 마이클 조던은 트로피를 안고 울면서 그때 필 잭슨 감독의 지휘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90-1991 시즌 우승을 시작으로 시카고 불스는 왕조가 됐다. 1998년까지 6번 NBA 정상에 올랐다. 마이클 조던은 황제가 됐다. 그리고 나이키 역시 스포츠웨어의 제왕이 됐다. 엘리엇 힐은 나이키의 팀 스포츠 부문에서 전 과정을 함께 했다. 2년 마다 승진을 거듭하면서 결국 나이키 탑매니지먼트의 일원이 됐다. 


1990년대의 기억은 나이키 DNA의 일부가 됐다. 저스트 두 잇으로 시작해서 마이클 조던으로 마무리된 1990년대는 나이키를 단순한 스포츠 브랜드를 넘어 스포츠 스피릿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나이키는 암흑기를 보내게 된다. 나이키를 상징하는 NBA의 인기가 시들해진 것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원인은 환경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나이키는 생산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2가지 요소를 투입했다. 하나는 기술이었고 하나는 노동력이었다. 두 가지 모두가 나이키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나이키가 도입한 공급만 관리 소프트웨어는 재앙 그 자체였다. 주문량과 생산량의 미스매치가 발생했고 대규모 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나이키의 아시아 오프쇼어링 전략도 문제였다. 나이키는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아시아에 공장을 지었고 이건 노동 착취 문제를 낳았다. 저스트 두 잇으로 구축된 나이키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시아 노동 착취 문제로 오염되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엇 힐은 1990년대 나이키의 황금기와 2000년대 나이키의 암흑기를 모두 경험했다. 두 시기의 차이는 분명했다. 1990년대 나이키는 하나의 브랜드였고 하나의 팀이었다. 2000년대 나이키는 생산비용에 치중하면서 아시아에 공장을 짓기 바빴고 유통비용에 집중하며 재고를 유통사한테 넘기가 바쁜 팀이 아니라 기업 집단에 가까웠다. 암흑기에도 엘리엇 힐은 원팀을 강조했다. 부사장 레벨로 올라서고 나선 글로벌 시장에 집중하면서도 언제나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는 마켓 플레이스에 집중했다. 


엘리엇 힐은 2010년대 후반 나이키의 부활을 이끈 다이렉트 투 컨슈머 전략의 중심에 있었다. D2C 전략은 나이키가 아디다스 같은 경쟁사들을 농구코트 뿐만 아니라 축구그라운드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나이키의 앱과 웹을 통해 나이키 브랜드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것의 본질은 엘리엇 힐이 나이키를 하나의 스포츠팀으로 봤기 때문에 가능했다. 스포츠팀은 스포츠 현장에서 팬과 선수가 직접적으로 소통한다. 엘리엇 힐은 디지털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도 이런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통찰했고 실행했다. 그렇게 나이키를 브랜드를 넘어 직접 소통이 가능한 온라인 커뮤니티로 만들었다.   

   

스포츠 구단은 지역 커뮤니티 역할을 하곤 한다. 축구구단 맨체스터 시티가 맨체스터라는 도시의 커뮤니티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맨체스터 출신의 세계적인 밴드였지만 해체됐던 오아시스는 만일 맨체스터 시티가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하면 재결성을 약속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맨체스터 시티는 2024년 6월 클럽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했다. 오아시스도 2024년 8월 재결합을 발표했다. 이것이 커뮤니티로서의 스포츠의 힘인 것이다. 엘리엇 힐은 나이키를 이런 커뮤니티로 만들었다. 


엘리엇 힐은 나이키 안에선 지장이면서 덕장으로 유명하다. 2000년대의 위기를 2010년대에 극복하는 과정에서 엘리엇 힐은 스포츠 코치와 같은 리더쉽을 보여줬다. 나이키 직원들이 가장 함께 일하고 싶은 리더로서 엘리엇 힐을 꼽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엘리엇 힐은 스포츠 코치가 선수들에게 그러하듯이 동기 부여에 매우 큰 시간을 할애했다. 회사 조직 특유의 상명 하복은 스포츠팀에선 잘 통하지 않는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은 선수이지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의 역할은 선수가 스스로 뛰게 만드는 것이다. 나이키를 하나의 팀 스포츠로 봤던 엘리엇 힐은 팀원들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게 만들었다. 엘리엇 힐이 나이키의 영혼을 가장 잘 아는 경영자인 이유다.


정작 나이키는 나이키의 영혼을 버렸었다. 2020년 엘리엇 힐은 유력한 CEO 후보였다. 정작 나이키 이사회는 내부 승진자인 엘리엇 힐 대신 존 도나호를 차기 CEO로 선임했다. 존 도나호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컨설팅 회사 베인에서 일했다. 이베이의 최고경영자였다. 페이팔의 이사회 의장이었다. 20개 가까운 직함이 모두 나이키 명함인 엘리엇 힐과 정반대였다. 나이키 이사회는 수수한 엘리엇 힐 대신 화려한 존 도나호를 선택했다. 


2020년 코로나 판데믹이 닥치면서 나이키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급격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나이키의 매출은 2020년 2분기에 60억 달러까지 쪼그라들었다. 코로나 판데믹이라는 특수 상황이 지나면서 다시 나이키의 실적은 회복됐지만 문제는 추세였다. 나이키는 2010년대 엘리엇 힐이 리드하던 시기의 전성기를 회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매출과 영업이익을 단시간에 회복시키느라 나이키는 풋록커 같은 오랜 유통 파트너와의 제휴 관계를 끊었다. 브랜드 가치에는 소홀해지고 매출 극대화에 집중했다. 당연히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는 하락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700명이 넘는 직원이 나이키를 떠났다. 엘리엇 힐도 그 중 하나였다. 


나이키 브랜드 가치의 하락을 보여주는 가장 핵심 지표가 리셀가다. 나이키의 리셀가는 2020년까지만 해도 승승장구였다. 2022년부터 리셀 가겨은 평균 7% 이상 하락하기 시작했다. 2023년엔 대표적인 나이키 테크의 제품인 에어 조단의 리셀가가 4% 넘게 떨어졌다. 나이키는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리셀 시장을 키웠지만 리셀 시장이 위축되면서 그 여파가 나이키 전체 판매에까지 영향을 주게 됐다. 기준 금리 인상으로 주식 시장과 코인 시장이 위축된 것처럼 리셀 시장도 위축됐고 이것이 나이키한테도 직격탄이 된 것이다. 


결국 나이키는 나이키의 영혼으로 불렸던 엘리엇 힐을 다시 CEO로 앉히는 선택을 했다. 나이키를 떠난 엘리엇 힐은 지역 야구 클럽인 오스틴 문타워스를 설립해서 집중하고 있었다. 엘리엇 힐의 선임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나이키 주가는 8% 넘게 급등할 정도였다. 나이키를 다시 나이키답게 부활시킬 최고경영자가 돌아왔다는 의미였다. 나이키 스스로도 나이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그걸 시장도 지지한다는 의미였다. 


엘리엇 힐은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나이키의 희노애락을 모두 알고 있는 나이키인이다. 나이키가 제국이 된 것은 1990년대 팀 스포츠의 전성기를 통해서였다. 당시 나이키는 코치와 운동선수가 설립한 창업 정신이 살아 있었다. 스포츠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브랜드였다. 아디다스와의 경쟁에서 스트리트 패션 경쟁에도 뛰어들었고 리셀 시장에서도 싸웠지만 결국 나이키의 본질은 스포츠인 것이다. 저스트 두 잇 말이다. 


앨리엇 힐이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식스와 아디다스와 뉴 발란스한테 빼앗긴 나이키의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려면 저스트 두 잇 같은 가치를 회복해야만 한다.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를 왕조로 만들면서 나이키가 아이콘이 되던 때와 같은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나이키는 최근 비슷비슷한 제품을 반복 생산하면서 소비자들을 식상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나이키는 D2C로 우위를 점했던 디지털 시장에서 판매가 20%나 줄었다. 자꾸 할인을 반복하면서 소비자들한테 제품을 밀어내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할인은 결국 다음달 매출을 이번달로 끌어오는 일이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무엇보다 나이키에 소비자들이 환호하게 할 만한 신선한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나이키 앱과 웹 트래픽이 10% 이상 감소해버렸다. 


나이키를 신은 마이클 조던이 컨버서를 신은 매직 존슨을 밀어내고 더 무브를 하면서 황제에 등극하던 때와 같은 새로움이 없는 것이다. 결국 앨리엇 힐의 숙제는 다시 고객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저스트 두 잇 어게인이다. 



온라인 인물 도서관 서비스 라이프러리의 인물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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