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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Apr 14. 2020

먼 북소리

KODEX 인버스 114800

33 대 64. 깜짝 놀랐다. 국내 주식과 해외 주식 비중이 딱 2배였다. 이렇게까지였구나 싶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국내든 해외든 주식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매수하긴 했다. 코로나 위기는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나마 초보 투자자스러운 실수를 덜 저지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투자가 마크 마이너비니는 <시장의 마법사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덜 숙련된 트레이더들은 주가가 내려오면 사려고 기다리지만 그런 기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주가가 충분히 떨어졌다 싶으면 더 떨어지길 기다리거나 하지 않고 일단 사고 봤다. 그날 사겠다고 마음 먹은 주식은 거의 대부분 샀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우량주가 폭락한 경우가 많았던 뉴욕증시에서 더 많은 주식을 사들이게 됐다. 정말 3월엔 그런 기회들이 널려 있었다. 4월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기회가 줄어들었다. 눈이 어두워서 기회를 못 찾는건가 싶었다. 어떤 시장에서도 기회는 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다시 재미를 느끼게 해준건, 투자가 가져다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트레이더 스티브 왓슨은 잭 슈웨거한테 이렇게 말했다. “종목을 선정하는 일은 과학의 예술입니다.” 왓슨은 피터 린치를 인용했다. “피터 린치는 말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주식을 보유하는 이유를 글로 써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주식을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피터 린치는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에서 주식을 매매하기 전에 5분 정도 자신과의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저널리스트여서 그런지, 투자와 글쓰기가 닮아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과의 솔직한 대화다. 글쓰기는 결과와 결정의 논리적 해부다. 글쓰기는 과학적 현상에 관한 예술적 설명이다. 실제로 투자를 거듭할수록 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도 커지는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해선 기업을 글로 해부하고 시장을 글로 분석하고 세상을 글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에 글만큼 예리한 매스는 없다. 

어쨌든, 4월 둘째주로 접어들면서 고민이 생겼다. 포트폴리오가 가득 차버렸다. 여물통에 돼지가 많아졌다는 얘기다. 여물통의 돼지는 스티브 왓슨이 쓴 비유다. 포트폴리오에 새로운 주식을 추가하려면 다른 주식을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을 뜻한다. 새로운 돼지가 여물통에 자리를 차지하려면 다른 돼지 한 마디를 밀어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정리하고 싶은 종목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장은 아직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회복되진 못했다. 당장 수익이 나고 있다고 해도 지금 차익실현을 하는건 성급했다. 기다리면 오른다. 오늘 매수한 셀트리온제약처럼 사자마자 떨어진 종목의 경우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손실이 났다고 당장 손절을 할만큼 조급한 입장은 아니었다. 기다리면 회복된다. 내공이 모자라서 기회를 못 찾는게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었다. 이미 여물통이 가득차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본게, 인버스 ETF였다. ETF는 개미를 넘어서 불개미가 되는 길이었다. 게다가 인버스 ETF라면 불개미 중의 불개미들만 들어가는 투자였다. 애초에 투자를 본격화할 때부터 ETF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ETF는 초보 투자자들한텐 현명한 투자처다. 삼성전자에만  투자하는 것보다 KODEX 반도체 ETF에 투자하는게 훨씬 능률적이다. SK하이닉스부터 서울반도체까지 대한민국 반도체 벨류체인 전체에 한꺼번에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KODEX 반도체 ETF라면 보나다마 삼성자산운용의 반도체 최고수가 운용할테고 말이다. 게다가 거래세도 없다. 매매차익에 따른 세금도 없다. 대신 수수료만 내면 된다. 약간이다. 

그런데도 ETF를 마다한건 글을 쓸 수가 없어서였다. 농담이지만 어떤 면에선 진실이다. ETF 투자는 돈은 벌 수 있어도 스토리는 벌 수 없다. 직접 내린 결정이 없기 때문에 이익과 손실은 있어도 성공도 실패도 없다.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잭 슈웨거가 <주식 시장의 마법사들>의 마지막에 남긴 조언이다. KODEX ETF는 삼성자산운용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TIGER ETF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투자자가 글로 기록할만한건 아무것도 없다. ETF로는 좋은 저널리스트도 좋은 투자자도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인버스 ETF를 찾아본건 역발상 투자를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였다. 증시의 변동성이 커진 상태다. 그렇다면 주가가 떨어질 때도 수익이 나면 바람직하지 않을까. 사실상 하방 리스크 헷징은 전혀 안 해놓은 상태였다. 액티브 펀드 매니저라도 되는 양 무조건 오를거라고 믿으면서 저평가된 우량 주식들을 사모으기만 했다. 이래도 될까. 이번주는 미국 기업들의 1분기 어닝 시즌이다. 4월 17일 금요일엔 중국의 1분기 GDP 성장률이 발표된다. 1분기면 중국경제가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시기다. 시장 컨센서스는 마이너스 10% 안팎이다. 악재의 지뢰밭이란 얘기다. 이 정도면 주가가 출렁거리는게 정상이다. 개별 보유 종목의 주가가 떨어진다고 해서 매도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인버스 ETF를 좀 사놓으면 하락장에서도 수익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안 샀다. 일단 인버스 ETF를 몇 주 산다고 해서 헷징되긴 힘들만큼 포트폴리오가 커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주가가 쉽사리 하락할 것 같지가 않았다. 코로나 사태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자국 자산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2중3중의 보호장치를 마련해둔 상태다. 심지어 실물위기로 기업들이 도산하는걸 막기 위해 무한대로 회사채까지 사들이고 있다. 소비가 위축되자 호주머니에 돈을 푹푹 찔러주고 실직을 하면 먹고는 살 수 있도록 실업수당도 듬뿍 나눠주고 있다. 코로나 위기는 2008년 금융 위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금융 위기는 시스템 내부의 탐욕이 부른 인재였다. 코로나 위기는 전염병이라는 천재다. 코로나 때문에 망하게 생긴 기업도 직장을 잃은 사람도 심지어 주가 폭락으로 투자금을 날린 펀드 매니저도, 아무 잘못이 없다. <굿 윌 헌팅>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로빈 윌리엄스가 상처 받은 맷 데이먼한테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 

코로나 사태에서 시장 참여자 모두는 피해자일 뿐 이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시점에서 2020년 코로나 위기를 이해하면 안 되는 이유다. 금융 위기에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었고 리만 브라더스처럼 죽어 마땅한 놈도 있었다. 코로나 위기에선 전염병으로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자들과 전염병으로 원통하게 재산을 잃은 자들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경제 지표가 나빠도 그것이 3월처럼 주가를 폭락시킬 악재일 수는 없다. 게다가 2분기 실적에 관해선 시장은 기대도 안 한다. 알려진 악재는 더 이상 악재가 아니다. 

게다가 인버스 ETF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인버스는 주가의 하락에 배팅하게 설계돼 있다. 그런데 기준은 하락폭이 아니라 하락률이다. 하락장이 계속되면 상관 없다.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면서 이익을 봤다가 손실을 봤다가를 거듭하면 결과적으로 손실만 겹겹이 쌓이는 원리다. 하락률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카지노는 절대 손해를 안 보게 승률을 조작해놓은 빠징코 게임기와 같다. 심지어 KODEX200 선물인버스2X 상품처럼 레버리지까지 쓰면 위험천만이다. 이익은 산술급수로 증가하지만 손실은 기하급수로 폭증한다. 이쯤되면 바카라다. 

4월 14일 화요일장에서 코스피 종가는 1857.08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스피가 2010년대 중반까지 지리하게 갇혀 있었던 1800대 박스권이다. 결국 미국 경제가 회복되고 월가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을 다시 매수하기 시작할 때까진 이 즈음에서 지리한 일진일퇴를 거듭할 공산이 크다. 그만큼 투자 기회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물론 내공이 모자라서 혼자만 기회를 못 보고 있는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당분간은 여물통에 돼지들이 가득한 채로 포트폴리오를 유지할 수밖에 없단 뜻이다. 

그래도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는건 좋은 것이다. 시세차익이나 배당수익과 비슷한 무형이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한동안은 쓰고 싶은게 별로 없었다. 세상만사가 심드렁했다. 지금은 써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배우고 싶은 흥미진진한 것들 투성이다. 무라카리 하루키는 <먼 북소리>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는 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내 몸이 말을 찾아서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우연히, 시장에서 들려오는 먼 북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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