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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Apr 18. 2020

대마불사

보잉 BA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라.” 유명한 증시 격언이다. 이제까지 별반 틀린 적이 없었던 따끔한 충고다. 개인투자자 입장에선 실천하기가 쉽지가 않다. 뉴스엔 손쉽게 피폭된다. 소문엔 상대적으로 어둡다. 그래서 언론에서 다루는 기업을 우루루 추격 매수하게 된다. 최소한 상투를 잡는다. 자칫 세력이라고 불리는 투자자들의 희생양이 된다. 요즘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라는 책을 다시 읽고 있다. 대한민국 1세대 증권맨인 저자 윤재수는 100년 역사를 정리한 역작의 마지막장 ‘역사가 알려주는 투자의 원칙’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개인 투자자들도 급등 초기엔 웬만하면 추격 매수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가가 예상과 달리 지속적으로 상승하면 상한가 한 번만 먹고 빨리 나와야지로 생각이 바뀐다. 결국엔 위험을 감수하고 매수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 개미들의 투자 심리다.” 덧붙인다. “개미들은 대박주가 고점 대비 30%에서 50% 하락하면 세력이 다시 들어올 것으로 기대하고 매수에 가담하지만 한번 빠져나간 세력은 결코 같은 종목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래서 뉴스에 사면 늘 한발 늦는다. 한발 늦으면,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 속 이렇게 무수한 패배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기 쉽다. 

그래서 결국 보잉을 안 샀다. 4월 17일 금요일 미국장에서 오늘이야말로 보잉을 매수하겠다고 작정까지 했었는데도 말이다. 솔직히 보잉은 여러 가지로 취향저격하는 기업이다. 우주항공주에 대한 짝사랑만큼은 워렌 버핏 못지 않다. <인터스텔라>나 <마션> 같은 우주항공영화를 무한 애정하는 취향이 투자로까지 이어졌다. 보잉은 전세계 항공기 시장을 양분하는 독점 기업이다. 게다가 2중 악재로 주가가 고점 대비 바닥이었다. 주당 400달러에 근접했던 주가는 한때 89달러까지 폭락했다. 2019년엔 737맥스가 사고를 일으켰다. 2020년엔 코로나로 항공산업이 붕괴됐다. 

게다가 내심 보잉은 절대 망할 수는 없는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잉은 전후방 산업 연관성이 어마어마하다. 관계회사는 1만7000개. 관계인력은 250만명. 미국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 한때 GM이 망하면 미국이 망한다고 했었다. 보잉이 망하면 정말 미국이 망한다. 그러다 4월 16일 쏟아져나온 보잉 관련 뉴스들한테 제대로 현혹됐다. 보잉 주가는 4월 16일 목요일 정규 시장이 끝나고 시간 외 거래에서 11.76달러나 올랐다. 무려 8.76%나 급등했다. 그래서 4월 17일 금요일장에선 미국장이 개장하자마자 146달러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이런 갭상승은 주가 상승의 전형적인 전조다. 다우존스가 연일 상승세인 것도 보잉의 주가가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3월 초 다우존스 폭락의 원인도 보잉이었다. 보잉 주가는 1주일만에 44%나 빠졌다. 300달러 후반대에서 100달러 아래까지 쳐박혔다. 언론들은 보잉 주가 회복이 증시 바닥 탈출의 명백한 신호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말은 됐다. 보잉이 추락해서 폭락장이 시작됐으니까 보잉이 이륙하면 폭락장은 끝난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명백한 호재까지 있었다. 4월 20일부터 워싱턴주 시애틀 일대 보잉 공장이 재가동을 한다는 뉴스였다. 심지어 문제의 737 맥스의 생산라인까지 재가동될 모양이었다. 설계결함 문제를 해결했다는 의미였다. 뉴스만 보면 보잉을 안 살 이유가 없어보였다. 시간 외 거래에서 보잉 주가가 폭등한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도 끝내 보잉을 안 샀다. 야후 파이낸스의 보잉 주가 그래프만 쳐다보다가 접었다. 한번 스스로한테 질문을 던져봤다. 왜 보잉은 절대 망할 수 없는 기업이라고 생각할까. 2008년 금융위기 때 GM이 망해서 미국이 망하는 꼴을 봤던 기억이 났다. 2008년 경제위기에서 금융위기의 진앙이 리만브라더스 몰락이었다면 실물위기의 결과는 GM의 파산이었다. GM은 2008년 오바마 행정부로부터 134억 달러, 그러니까 20조원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았지만 2009년 6월 1일 챕터11을 신청했다. 보잉도 트럼프 행정부한테 600억 달러의 공적자금 지원을 요청한 상태다. 우리 돈으론 77조4000억원. GM이 받았던 공적자금의 4.5배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는 2조2000억 달러 규모의 코로나 경기 부양 패키지 안에 170억 달러 정도를 보잉을 위해 전용해둔 상태다. 역시나 미국 정부는 결코 보잉을 망하게 둘 순 없다. 대마불사다. 여기까지 추리하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진작에 보잉 주식을 살걸. 왜 그동안은 보잉을 거들떠도 안 봤을까. 이미 보잉 주가는 최고가의 절반 가까이 회복한 상태다. 주당 100달러 미만일 때 샀다면 대박이었을텐데. 

그래도 안 샀다. 실제로는 신한금융투자의 해외주식매수창에 매수가와 매수량까지 입력했었다. 취소했다. 보잉의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본질적인 문제는 보잉 경영진도 대마불사를 안 다는 사실이다. 데이비드 칼훈 보잉 CEO는 말했다. “정부가 자금 지원 대가로 보잉 지분을 요구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정부돈은 필요한데 경영권은 지키겠다는 얘기였다. 지금 보잉은 은행권 돈줄이 완전 막혀버린 상태다. 피치는 보잉의 신용등급을 BBB로 낮췄다. 정크본드 직전 등급이다. 2020년 1분기에만 150대의 항공기 주문이 취소된 상태다. 당연하다. 항공기를 운항하는 항공사들이 파산 직전이다. 737 맥스 때문에 벼랑 끝에 몰린 항공사도 있다. 이스타 항공이 대표적이다. 737 맥스는 연료효율이 높아서 저가항공사들한테 특화된 기종이었다. 그래서 LCC들의 피해가 더 크다. 보잉은 이런 항공사들한테 손실 보전을 해줘야 한다. 2건의 사고 원인이 항공사가 아니라 항공기 제조사에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 만큼 유족에 대한 보상도 보잉 책임이다. 이쯤되면 안 망하는게 용하다 싶을 정도다. 그런데도 보잉은 대마불사를 믿고 적반하장이다. 

어찌보면 참 보잉스러운 상황이다. 데이비드 칼훈은 737맥스 추락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난해 12월에 전임자 데니스 뮐렌버그가 물러난 이후 선임됐다. 데이비드 칼훈은 GE 출신이다. 2009년부터 보잉에서 일했다. 2019년부터 보잉의 이사회 의장이었다. 데이비드 칼훈이나 데니스 뮐렌버그나 보잉의 인사이더인건 마찬가지란 말이다. 2018년 10월의 인도네시아 라이온에어 추락 사고와 2019년 3월의 에티오피아 여객기 추락 사고의 근본 원인을 감추는데만 급급했다. 원인은 설계 결함이었다. MCAS라고 불리는 기체자세제어소프트웨어에 불량이 있었다. 보잉은 이걸 감추다가 전세계 40여개 나라로부터 737 맥스 운항 금지라는 철퇴를 맞았다. 두 건의 사고로 무려 346명이 죽었다. 이만큼이나 보잉은 자사 이기주의와 사내 비밀주의는 극심한 기업이다. 사실 초우량기업이었던 보잉이 이꼴이 된건 단지 737과 코로나의 2중 악재 탓만은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벌었던 현금을 모조리 자사주 매각과 배당으로 소진해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가는 좋았다. 스톡옵션을 받은 인사이더 임원들은 더 좋았다. 막상 난기류를 만나자 종이비행기처럼 추락해버렸다. 급할 때 쓸 현금을 비축해놓지 않아서였다. 이렇게 보잉처럼 망해가면서도 큰 소리를 쳤고 현금 한 푼 없는 깡통 대기업이었으며 정부돈을 받았지만 자중지란으로 파산한 기업이 또 있었다. GM. 보잉의 지금 모습은 2008년 GM의 모습과 판박이다. 지금 GM은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라고 외쳤던 알프레드 슬론이 이끌었던 그 GM이 아니다. 그랬던 올드GM은 2009년에 파산했다. 지금의 GM은 2010년 11월 18일에 뉴욕증시에 재상장된 뉴GM이다. 올드GM의 주식은 파산과 함께 휴지 조각이 됐다. GM은 안 망한다. 주주는 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가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는 보잉 주가는 차트만 보면 정말 매력적으로 보였다. 737 맥스 문제가 불거진건 2019년 얘기다. 보잉 주가는 결국 회복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탐욕이라는걸 알면서도 명백한 팩트 두 가지가 자꾸 투자를 유혹했다. 보잉 주가가 시간 외 시장에서 9% 가까이 올랐다는 팩트와 4월 20일부터 보잉 공장이 재가동된다는 팩트 말이다. 그런데 보잉의 최근 몇 달간 주식 동향을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보잉 주가가 시간 외 거래에서 급등하는 갭상승을 보인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4월 8일 수요일 주당 146.72달러였던 주식이 4월 9일 목요일엔 주당 152.05달러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4월 7일과 8일에도 갭승상이 있었다. 4월 6일 종가는 148.43달러였고 4월 7일 개장가는 159.04달러였다. 4월 7일엔 장중 한때 163.78달러까지 치솟았었다. 모두가 시간 외 거래로 이만큼 상승했다. 마치 누군가 보잉 주가를 높게 유지해야 하는 필요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스톡옵션을 잔뜩 가진 보잉 인사이더들한텐 좋았겠지만 말이다. 갭상승 이후에 주가는 폭등했다가 시름시름 시들기를 반복했었다. 어쨌든 중요한건 갭상승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보잉 주가가 처음 폭등한 것도 아니란 말이다. 다만 그땐 국내 언론에 거의 보도가 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4월 7일 즈음엔 미국 신규 실업수당 청구건수 같은 악재가 쏟아지면서 보잉 주가 상승에 주목한 뉴스가 많지 않았다. 이번에 보잉 주가가 새삼 스포트라이트를 받은건 다우존스가 연일 상승하자 다들 원인을 찾아야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갭상승이라는 팩트는 보잉에 투자할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그래도 공장 재가동은 분명 호재다. 이전 갭승상과 이번 갭상승이 다른 이유다. 구체적인 재료가 있는 상승 같아 보여서다. 의문이 남았다. 항공기를 만들면 팔리기는 할까. 지금 항공사들은 개점 휴업 상태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서 운항을 재개한다고 해도 당장 항공기 수요부터 늘어날 공산은 낮다. 안 그래도 항공기 주문 취소만 늘고 있는 상황이다. 보잉 매출의 태반을 차지하는 주력 기종인 737 맥스는 올해 여름이나 돼야 운항 재개 여부가 확정된다. 그러니까 보잉은 지금 살 사람도 없는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공장문을 다시 열면 임금을 비롯한 비용만 증가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재무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 지금 공장을 재가동하지 않으면 협력업체의 줄도산이 현실화된다. 보잉의 펀더멘탈엔 치명타다. 그래도 이게 전부일까. 보잉한테 지금 협력업체들을 생각해줄 정도의 여유가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활동 재개를 원하고 있다. 경제 재건은 트럼프의 대선 재선과 직결돼 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른 주지사들과 공개설전을 벌일 정도다. 보잉은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하는 입장이다. 디테일이 문제다. 보잉은 GM이 거번먼트 모터스가 됐던 것처럼 거번먼트 항공사가 되고 싶진 않다. 보잉이 5월도 채 안 돼서 공장문을 활짝 열어버린건 고객의 돈이 아니라 정부의 돈을 받기 위해서는 아닐까. 

그래서 결국 보잉을 안 샀다. CMA통장엔 미국 주식을 판 원금과 차익이 좀 있었는데도 말이다. 딱 2주만 매수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오르면 좋다. 언론은 논리로 말하지만 투자는 논리보단 성과다. 지금까지의 통찰이 틀려도 주가가 올라서 돈만 벌면 그게 맞다. 시장에선 논리적인게 맞는게 아니다. 돈을 버는게 맞는 것이다. 2주만 사서 내려가도 밑져야 본전이다. 이상하게 그것조차도 안 했다. 그냥 깔끔하게 안 샀다. 결과에 승복하고 싶었다. 전망이 틀렸다면 틀린 것이다. 보잉으로는 돈을 못 번 것이다. <주식 투자 100년사>의 마지막 충고가 떠올랐다. “종목 선정의 출발점은 투자해서는 안 될 종목을 걸러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백년의 지혜가 담긴 충고라,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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