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보는 갤러리
한국 작가 중 최고의 경매가를 기록한 예술가, 백자를 사랑하던 예술가, 한국의 정서가 담긴 추상미술을 선물한 예술가 김환기, 그의 사랑이었던 김향안 씨에 의해 1979년 환기재단이 창립되었다. 그 4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뉴욕 생활 중 기록한 일기를 통해 솔직한 생각과 예술적 고뇌, 작가 기록물의 의미에 대하여 거리감 없이 접할 수 있었다.
환기재단 40주년 특별전 <Whanki in New York : 김환기 일기를 통해 본 작가의 삶과 예술>
2019.04.26. (금) ~ 2020.03.31. (화)
관람시간
*개관 오전 10시 ~ 오후 6시 *휴관 매주 월요일, 설날연휴, 추석연휴
동네의 분위기가 주는 힘이 있다. 부암동은 이상하리만치 고즈넉하다. 좁은 길을 지나 환기미술관에 도착했고 티켓과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는 아트샵으로 향했다. 찾아오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일까? 그에 보상하듯 친절한 직원분의 응대가 인상 깊었다.
아트샵 2층에서 판매 중인 작품들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성공하면 서로 선물하자며 한 작품씩 눈에 담아둔 뒤 특별전 <Whanki in New York : 김환기 일기를 통해 본 작가의 삶과 예술>이 진행 중인 전시실로 향했다. 회화작품보다는 관련 스케치와 기록물들로 이루어진 전시이며, 규모는 굉장히 작다. 지금 생각해봐도 많이 작다. 사진 촬영은 불가능했기에 메모장과 따라 걸었다.
슬플 때 듣는 이별노래 가사처럼, 좋아하는 영화의 명대사처럼 시보다 더 시 같은 문장들이 있다. 이번 전시는 잘 쓰인 시집 한 권을 읽는 기분이었다. 작품이 더욱 풍부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저녁을 하고
뉴욕 대학가에서 하늘을보니 만월이 아닌가
나는 왜 동양인이어서 그럴까
달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져...
1963.10.29
오후 세시삼십분 오늘은 어두워서 일이 안돼요. 눈 뒤에 비가 오나 봐.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 조국이라는 게, 고향이라는 게.
내 예술과 우리 서울과는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애... 내 그림 좋아요. 이제까지의 것은 하나도 안 좋아. 이제부터의 그림이 좋아. 저 정리된 단순한 구도, 저 미묘한 푸른 빛깔.
이것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일일 거야... 어두워졌어요.
...
1963.12.12
거리엔 적설.
눈이 쌓이면 스튜디오가 밝아진다.
간신히 점화 <겨울의 새벽별>을 완성. 완성의 쾌감. 예술은 절박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1965.1.11
종일 제작. 명랑한 기분으로 나간다.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다.
1965.1.19
선(線)과 점(點)을 좀 더 밀고 가보자.
1965.1.24
일이 잘 가는 셈.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공부를 하라.
그리고 자신을 가져라.
용감하라.
1965.1.25
재미난 생각을 했다.
우리집(서울 서교동) 공지에 4층 집을 짓고
두 층은 우리가 쓰고 두 층은 사설 미술관을 하자고. 음악 학생, 무명 음악가로 하여금 연주회도 하고 입장료 있는 개전도 하고, 그림엽서 출판도 하고. 오늘도 그림 미완성. 내일은 끝내야지.
작품명은 <외로운 이 얘기>
1965.1.17
종일 화폭 속을 두 개 만드니 지쳐 버린다.
밤엔 우울한 심정. 미술의 밀림에 투족(投足)한 지 오래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꿈을 이루고 귀국해야지
1965.2.5
오늘의 미술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가질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1968.5.1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간혹 울 때가 있다. 음악.문학.무용.연극 - 모두 다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할 것인가.
1968.1.26
공원 건너 르페브르(갤러리)에 가다.
베리의 전기난로 같은 것은 전부 팔려 있다. 어떤 속인지 알 수 없는 일.
예술의 의미가 벌써 없어진 지가 오래가 아닐까. 재미나는 것, 신기한 거, 그런거면 고만인 것 같다. 57가에 내려가 프랑켄슬러 전시 보다. 괜히 대작으로 한 몫 본 것 같다. 걸어 돌아오는데 덥다. 십자구도시작하다. 저녁때 완성.
1968.4.13
쾌청(快晴). 리버사이드에 나가 볕 쪼이다.
능금 꽃이 저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만개(滿開)는 백(白)이요, 봉오리는 진홍이어서 점점(點點)이 붉은 점은 형용하기 어렵도록 아름답다.
1968.4.28
작가가 늘 조심할 것은 상식적인 안목에 붙잡히는 것이다. 늘 새로운 눈으로, 처음 뜨는 눈으로 작품을대할 것이다.
1968.7.2
내 작품은 공간의 세계란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 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 주는 것일까. 그렇다. 내 점의 세계... 나는 새로운 창을 하나 열어 주었는데 거기 새로운 세계는 안 보이는가 보다. 오호라...
1970.1.8
일어나니 눈이 내린다. 간밤에도 눈이 왔던 모양. 어제 시작한 oil on paper 2점, 오늘 끝내고 새로 한 점 끝내다. 진눈깨비가 날린다. 고생하며 예술을 지속한다는 것은 예술로 살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고생이 무서워 예술을 정지하고, 살기 위해 딴 일을 하다가 다시 예술로 정진이 된 것일까.
1970.1.12
나는 술을 마셔야 천재가 된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1971.1.27
비 내린 밤.
미애, 용진한테 가다.
술, 예술론으로 밤을 새우다.
결론은 젊은 사람들은 서양의 우수성, 나는 동양정신에 입각.
1971.4.24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1972.9.14
해피 뉴 이얼.
얼마 만의 햇빛인가! rock land를 처음 나가 보다. 이 땅은 어디를 가도 넓고 아름다운 자연이다. 향(香)과 한참 거닐다 들어오다. 내일은 mt.bear에나 나갈까? 오랜만에 oil on paper를 시작해 보다.
ultra blue 공간을 ultra violet으로 메우다. 밀물처럼 정열(제작)이 오고 했는데 근자엔 그것이 없다.
1973.1.1
오늘도 해가 난다. 기온은 여전히 춥고 추운 겨울. 다양한 집을 생각해 보다.
예술은 이론을 초월하는 데 묘미가 있다. 흑점화완성. 밤. 또 청점 시작.
1973.2.12
미술(美術)이란 인간의 원동력
1973.9.24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1973.10.8
종일 비다. #332 (2/3) 끝내다.
창작이란 많은 경험에서 오는 것.
1974.5.12
새벽부터 비가 왔나 보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1974.6.16
해가 환히 든다. 오늘 한 시에 수술. 내 침대엔 ‘nothing by mouth’가 붙어 있다.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1974.7.12
김환기의 '우주'가 132억 원에 판매되며 한국 미술계의 염원이었던 100억 작품이 탄생했다. "작품을 팔지 않기로 마음먹으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더라" 라 말하며 생활고를 겪던 그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점(點)을 찍었을까 전시가 끝나고 난 뒤 아트샵으로 돌아와 아내 김향안의 에세이를 읽었다.
"수향산방은 50년 전의 꿈이다. 근원 선생이 노시산방을 물려주면서 이름 지어주신 우리들의 보금자리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서 환기미술관이 세워지고 ... 중략
사람은 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 되뇌이던 수화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1997.10.10 김향안
*수화(樹話) - 김환기의 호
ps. 사랑이 특별한 것인지 예술가의 사랑이 특별한 것인지 둘의 사랑 또한 하나의 예술 같았다. 결국 미술도 사람을 울렸다. 그러면 울지 않는 사랑은 있을 것인가, 부암동의 하늘이 지독히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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