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검정 고무신
어느 마을에 한 자린고비가 살았더란다.
그는 외출을 할 때면 손에 신발을 들고 가다가 사람이 저만치 오는 것을 보면 신발을 신고 서 있다 사람이 지나고 나면 다시 벗어 들고 가곤 했더란다.
신발 닳는 것이 아까워 그리 했다는 자린고비 이야기이다.
새 고무신을 사면 선반 위에 모셔두기도 하고 숲길이 아니면 벗어 들고 맨발로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새 고무신을 신고 등교한 날, 종례를 마치고 나와 신발장을 보니 신발이 없다.
혹여 내가 잘못 놓았을까 하여 아이들이 다 나가기를 기다렸으나 짝이 다른 헌 신발 한 켤레만 남아있다.
담임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모두 모아 신발 검사를 했지만 고만고만한 아이들의 발 크기도 비슷할 뿐 아니라 요즘처럼 다양한 디자인도 아닌 똑같은 검은색 통 고무신이었기에 찾을 길이 없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새 신발 신고 가면 잃어버린다고 당분간 집에서만 신으라던 어머니의 당부를 뒤로하고 신고 나온 터인데 …
할 수 없이 짝짝이 신발을 끌고 집으로 오는 길.
어깨에 맨 책보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나 되었고, 훤하게 뚫린 신작로도 답답하게 느껴지고, 길가의 미루나무들이 자꾸만 길을 막곤 했다.
마을 어귀 봇도랑에 걸터앉아 하릴없이 풀을 쥐어뜯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집으로 향했다.
꾸중을 들을까 봐 토담 밖에서 서성거리기를 한참, 구정물 버리려던 엄마의 눈에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그 기억 조각은 아리게만 다가온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꼈기 때문인가 보다.
고무신은 땀이 차면 끈적거리고 쉬 벗겨진다.
그래서 소나기 내리는 날 뜀박질을 하기 위해서는 벗어 들곤 하였다.
돌멩이를 차다가 신발이 벗겨져 멀리 날아가 논에라도 쳐 박히면 찾느라 논바닥을 한참이나 헤집기도 하였고, 꼴 짐을 지고 산비탈이던지 논둑길을 갈 때면 곧잘 신발이 벗겨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또, 고무신은 송사리와 올챙이. 도롱뇽을 담아 가지고 다니던 어항이 되기도 하였고, 한쪽 신발을 구부려 다른 한쪽에 넣고 흙도 싣고 솔방울도 실어 나르던 장난감 자동차도 되었다.
때론 어머니의 심부름에 투정을 부리며 높게 차올린 신발은 발을 떠나 시원스레 치솟아 세상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장마철 누런 황톳물 흐르는 도랑을 건너다 벗겨진 신발은 오래전 한강을 지나 서해바다에 닿아 주인이나 그릴 런지 …
초등학교(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할아버지의 흰 고무신이 무척이나 신고 싶었다. 하얀 신발은 할아버지의 외출용 신발이다.
짚수세미로 싹싹 문질러 때를 벗긴 하얀 고무신과 검은색 갓, 그리고 펄럭이는 흰 도포의 고름이 어울려 한 마리 학의 날갯짓 같기도 하였다. 하얀색이 주는 깔끔함과 안정적인 검은색의 조화 때문에 새겨진 영상 이리라.
반면에 검정고무신은 흙이 묻을라치면 도랑에 신고 들어가 두어 번 문지르면 그만이었고, 씻어도 때가 묻어도 붉은 진흙만 보이지 않으면 크게 표 나지 않는 서민들의 수더분한 삶 같은 느낌을 주는 신발이다.
중의 적삼이던지 낡은 군복이던지 어느 옷에나 어울려 천해 보이긴 하지만 그 조차도 귀하여 구멍 난 신발은 장날 읍내에 가지고 나가 때워다 신곤 했던, 서민들에게는 금쪽같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검정고무신.
되돌아보면 참 궁색한 시절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 시대 사람들의 삶을 떠이고 다녔던 고귀한 몸뚱이.
올챙이 오르르 파닥이던 아기자기한 기억들이 정겹게 담겨있는 신발.
실타래 하나를 다 풀어도 모자랄 만큼 즐겁고 아리고 아기자기한 기억이 담긴 고무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궁색하던 시절이지만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생활이 더욱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신발 가게를 지나며 검정고무신이 있는 것을 보면 신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올여름이 다 가기 전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물 얕은 도랑을 찾아 송사리를 쫓으며 옛 맛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