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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Jul 29. 2024

서평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스라이팅 된 의식의 해독제, 나의 진짜 행복 찾기

나를 알아가는 글쓰기, 에세이는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 책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나를 잘 안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막상 나를 알아가는 방법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 <강연자들>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가 의사 수련 시절 3년 간 정신분석을 받았는데, 그 후로 타인을 이해하는 그릇이 커졌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정신분석'이란 정신의학의 또 다른 표현 정도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1부는 '정신분석'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 짓는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뒤 이어 나올 이야기는 모두 이 책에서 서술한 라캉의 견해이다. 학계에서 라캉의 이론을 어디까지 수긍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 느꼈기에 독자들 또한 본인의 삶에 유익한 방향으로 선별적으로 의미를 짚어보는 독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일부분은 지나치게 궤변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각해 볼 만한 한 지점이 많은 책임은 분명했다. 


책의 1부에서는 '정신분석'은 '정신의학'과 '심리상담'과는 별개의 영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정신의학은 엄연히 의학의 범주 안에 속하며 과학적을 검증된 '치료'로서 기능한다. 심리상담은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문제의 해결을 '돕는' 임상실천으로, 의학이 아닌 '교육'의 범주에 속한다. 반면, 앞으로 얘기할 '정신분석'은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정신의학과 심리상담과는 구별된다. 아니, 추구하지 않는다기보다 '정신건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 자신의 내면 깊은 무의식을 분석함으로써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이 바로 정신분석이다. 인간이 태어나 그 시대와 태어난 가정 및 자라온 환경, 사건 등에 의해 형성된 이상과 삶의 부조화로 고통스럽지 않도록 나아가는 방향이다. 정신분석은 길게는 10년까지 오랜 기간과 비용 등의 노력을 들여 진행되지만 타인에 의해 해석되거나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저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지점까지 나아갈 뿐이다. 분석가는 어떤 조언이나 해석으로도 개입하지 않는다. 


애초에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100%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경우 ① 일반론을 적용한 것과 ② 자신의 심리와 타인의 심리를 혼동한 것 중 하나일 뿐입니다.


어찌 보면 정신의학이나 심리상담은 당장 표면적으로 드러난 증상을 없애 일상생활로 되돌리는 '대증요법'과 같은 느낌이라면, 정신분석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에 가깝다. 정신분석이 지향하는 점은 바로 환자의 특이성이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무의미함 등 숨겨진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특이성'은 자아라는 개념과는 구분된다. '자아'라는 개념조차도 결국 자기 자신이 표면적으로 이해한 객체화된 자신이기 때문이다. 


헷갈리지 말아야 할 부분 중 하나는 '그럼 진짜 자신을 알아간 후 내 멋대로 살면 행복한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사람 인', '사이 간' 이라는 글자에서도 드러나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진짜 나 자신에 대한 특이성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일반성이라는 양쪽을 모두 이해한 후에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식을 터득한다는 것은 겉으로 같은 모습일지라도 그 속은 전혀 다르다. 책에서는 그의미를 '특이성과 일반성의 사이좋은 교제'라고 설명했다.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라는 개념이 기본 축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개념들이 실존하는 것이냐,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냐, 사회적으로 합의된 개념일 뿐이냐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신체'란 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육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기관이 통합되어 이해되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상상계'에 속한다. 


상징계란 '언어'의 영역을 지시한다. 개개인은 절대 같은 감각과 개념, 이해 등을 100% 일치시킬 수 없다. 따라서 '언어'를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이용해 소통하며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간다. 그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상징계이다. 그리고 그 언어에 의해 문화가 생겨난다. 그리고 인간은 그 문화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으며 각자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현실계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정신분석 이론에서도 그 개념 자체가 다르게 변화해 온 개념이기도 하다. '언어'를 사용하는 상징계에서는 정의하기 불가능한 모든 것들을 오히려 '현실계'의 범주에 넣었다. 


이쯤 읽고 나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실체적 진실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조차 '타자'라 설명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바라볼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좌우가 바뀌고, 빛이 반사되어 그려진 하나의 '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울상을 보며 '저게 나구나'라고 학습되며 자라왔을 뿐이다.


그 '거울상'을 보며, '그게 너란다.' 라고 설명해 주는 생애 첫 대타자가 바로 부모, 특히 어머니이다. 그렇게 인간은 어머니의 절대적인 영향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설사 어머니가 부재하다 하더라도 그 부재함 자체가 끼치는 영향 또한 어마어마할 것이다. 더불어 절대적 대타자인 어머니가 사실은 아버지와의 불가피하고 긴밀한 관계 속에 있었다는 사실은 개인의 '특이성'을 형성하는 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정신분석의 과정에서 나의 유년시절과 부모, 가족에 대한 무의식을 헤짚어 내는 과정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것'으로 설명되었던 현실계에서의 주요 키워드는 '욕동[충동]'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불가능한 것'에 직면하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욕동'에 주목한다. 향락은 단순히 기분 좋은 쾌락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쾌락은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편안한 상태를 느끼는 것이라면, 향락은 반대로 긴장이 고조됨으로써 얻게 되는 지점이라는 양가적인 기분 좋음이다. '죽음 욕동'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욕동, 향락에 대해 자신의 특이성에 기반하여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으로 지속되는 향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무언가를 손에 넣고 나면 더 이상 그것은 욕동을 사로잡는 불가능한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자 인생의 지표로서의 '환상', 즉 '어떻게 향락할 것인가'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기분 좋음을 느끼게 되는가'라는 물음이다. 더불어 향락이 파괴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백'의 확보가 중요하다. 여기서 여백이란 아직 최고의 기분 좋음에 이르지 않았다는 미련을 받아들이고 그 공백 안에서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없다면 하나의 만족에만 의존증 상태로 집착하며 허우적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본디 삶은 왜 고통스러운가.

결국 다양한 고통은 결국 모든 인간이 대타자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결국 정신적인 고통은 대타자의 세계가 갖는 구조에 기인한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행복의 진리라 믿었던 실체가 사실은 가스라이팅 된 의식에 의해 잘못된 길로 한참 접어들었음을 깨닫는 시기가 온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 그곳에서 벗어나 이 책을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본래 대타자는 나에게 최고의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설령 대타자에 의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우리는 대타자에게 속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타자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기 위한 정신분석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자신이 지금 살아가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이상적이지 않고, 만인의 이해를 얻지 못하더라도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사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삶이 대타자의 이상에 맞는지 어떤지를 고려하지 않고, 필요 없는 일에 구애받지 않으며 사는 것입니다.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내가 전문적인 정신분석을 정식으로 받을 수는 없겠지만, 평소 글쓰기 모임에서 하고 있는 솔직한 글쓰기의 과정이 일면에서 정신분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때로는 손가락에서 쓰여지는대로 무의식이 툭 하고 튀어나올 때들이 있다. 그렇게 적혀진 글들을 다시 되짚어 보고 맥락을 추적하고 앞뒤를 정돈하다보면 내가 미처 몰랐던 내 의식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고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긍정적 에너지가 샘솟는다. 그러기에 글쓰기는 결국, 가능한 '솔직하게' 쓰는 게 맞는 것 같다. 그것은 치유의 글쓰기가 되어 진정 나다운 행복으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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