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타임즈 이지선 칼럼]
- '도멘 루 페레 에 피스, 부르고뉴 샤도네이' 와 이 영화를 마시다.
가족과 친구, 내 사람과 와인을 마시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하지만 혼자서 와인을 마시는 시간, ‘혼술’을 하는 시간에서 느끼는 나만의 여유는 행복하다. 나는 집에서 영화를 보며 와인을 마시는 이 작은 ‘행복’을 즐기는데 오락프로그램보다는 아무래도 와인의 감상을 더 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와인이 주제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와인에 대한 갈증이 생겨나고 심지어 마시고 있는 와인을 더 맛있게 느껴지게 만든다!
오늘 와인을 마시며 함께 보고 싶은 영화는 가장 최근 개봉작이자 일명 ‘와인영화’ 중 가장 감명 깊었던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이다. 이 프랑스 영화의 원제는 ‘Ce qui nous lie’로 ‘우리를 연결해주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영화 속에서 그 의미가 자연스레 이해되는 제목이다. 프랑스 부르고뉴 Bourgogne의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의 풍경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미장센이 상당히 아름다운데, 감독 ‘세드릭클라피쉬’와 사진작가가 1년 가까이 머물며 같은 장소에서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잘 담아냈다.
부르고뉴의 와이너리를 일컫는 ‘도멘 Domaine’의 오너인 아버지에게는 삼남매가 있다. 첫째 아들인 장, 둘째 딸인 줄리엣, 막내아들 제레미까지 이 중 첫째 아들인 장이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자기 방의 창문 너머로 매일 한결같은 포도밭 풍경을 보며 이 작은 세계에 신물을 느끼고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다는 갈증을 갖는 장. 실제로 부르고뉴는 포도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농촌 마을이며 가장 가까운 대도시라고 할 수 있는 디종은 50km나 떨어져 있으니 답답함을 느끼는 주인공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
그렇게 10년간 집을 떠난 장이 부르고뉴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그의 동생들은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연락을 끊고 지낸 그를 타박한다. 다음 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치르며 장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날, 자신의 여자친구가 아들을 출산하여 오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오해를 풀게 된다. 10년의 세월 동안 그는 아르헨티나의 멘도자에서 와인 양조를 배우고 현재 호주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음을 알리며 그토록 원하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노라 말한다.
이 장례식 날, 삼남매가 앉아 생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만들었던 와인을 마시며 그들의 시간을 공유한다. 아버지가 만든 와인이 ‘이제야 맛있게 익었다’는 줄리엣의 말은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와인은 숙성되고 이어져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득,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와인메이커는 와인을 남기는구나 라는 조금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이 씬은 영화의 포스터에도 사용되었는데 가장 의미가 있는 장면 중 하나임을 영화를 보며 알게 되었다.
줄리엣은 아버지의 와이너리를 물려받아 관리하고 첫 포도 수확 시기가 다가온다. 화이트 품종인 ‘샤도네이’가 포도나무에 탐스럽게 맺어 있고 줄리엣은 포도를 맛보며 수확 시기를 결정하려 한다. 8일 뒤에 수확하려는 줄리엣은 자신이라면 4일 뒤에 수확할 거라는 장과 충돌하게 되고 아버지와 일해왔던 포도밭 관리인은 “화이트는 때를 기다리면 늦다” 고 항상 이야기하던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어떤 산지나 수확 시기는 중요하지만, 부르고뉴는 단 며칠의 차이가 와인의 미래를 크게 좌우한다. 포도의 당도와 타닌이 완전히 익길 기다리자니 수확 시기에 자주 내리는 이 비가 문제이다. 비를 맞은 포도는 수분을 흡수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은 묽다. 그렇다고 너무 익지 않은 포도는 거친 산도와 타닌을 지닌 깊이 없는 와인을 만들어내며 과숙성된 포도로 만든 와인은 복합미가 없는 단조로운 와인이 되기 일쑤다.
이들이 포도를 먹어만 보고도 수확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건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교육해온 아버지의 영향이 커 보인다. 갓 7~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삼남매는 손수건으로 눈이 가려진 채 망고, 리치, 파인애플 등 온갖 과일들과 바닐라, 정향 등의 향신료를 시식한다. 또한, 아버지는 와인을 마셔보게 하며 테이스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향과 맛이 나는지 까다롭게 묻는다. 이런 아버지의 엄격함이 장이 집을 떠나게 하는데 한몫을 한 듯싶다.
부르고뉴는 크게 5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가장 북부 ‘샤블리’부터 ‘꼬뜨 드 뉘’, ‘꼬뜨 드 본’, ‘꼬뜨 샬로네즈’, ‘마꼬네’ 가 있으며 이 영화의 배경은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샤도네이’ 품종의 화이트 와인이 생산되는 ‘꼬뜨 드 본 Cote de Beaune’ 이다. 영화 속에서 이 화이트 와인과 피노누아로 만든 레드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줄곧 등장하는데 그 장면을 보며 자꾸 입에 침이 고이는 걸 막을 수 없다.
이 영화의 갈등은 아버지의 유산상속 문제로 시작한다. 삼남매는 8천 평의 밭과 집을 상속받기 위해 상속세로 5억을 내야 하는데 당장은 그럴 여유조차 없다. 공증인은 집이나 몇 구획의 밭을 팔아 갚을 것을 조언하지만 삼남매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부르고뉴 유산상속의 역사는 굉장히 재밌는데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으로 올라간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법에 의거하여 모든 자식은 포도밭과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 받게 된다. 5남매라면 5등분을, 3남매라면 3등분을 하여 상속이 되는 것으로, 세대가 이어져 내려오며 부르고뉴의 포도밭을 모자이크처럼 잘게 쪼개 놨다. 공증인은 와이너리를 팔길 권하며 “와이너리를 팔면 60억이고 와인을 팔면 그 수익의 1%만을 벌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장면은 나에게는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다.
부르고뉴는 와인 애호가들의 성지로 전 세계의 자본가들이 혈안이 되어 투자하고자 하는 곳이기도 하다. 와이너리를 팔면 그들은 손쉽게 부를 챙겨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가족의 전통과 삶의 터전을 버리지 않고 거기서 우직하게 와인을 빚어낸다. 그래서 부르고뉴 와이너리의 이름들을 보면 ‘도멘 루 페레 에 피스 Domaine Roux, Pere et Fils’ 처럼 아빠 Pere와 자식 Fils이 함께 와인을 만들어 오고 있음을 뜻하는 이름들이 자주 눈에 띈다. 게다가 그들이 소유한 밭은 이름만 들어도 애호가들이 열광하는 뫼르소 프리미에 크뤼 ‘레 페리에르’, 풀리니 몽라셰, 샤사뉴 몽라셰 등이 있어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와인장이인 나는 가슴이 꿀렁거렸다.
호주의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포도밭을 사서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장은 그 대출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유산을 전부 판매하길 원하지만 실제로 집과 포도밭을 사려는 이들이 누구 하나 좋게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자신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발견한 장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집으로 꼭 돌아오라’는 문구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고 내심 자신의 뿌리를 팔고 싶지 않던 마음이 더 커지게 된다. 결국, 그는 두 동생에게 자신이 받은 상속 몫을 팔고 천천히 갚아나가라며 호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자친구, 가족과의 갈등, 자신의 아들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가는 장의 모습이, 와이너리를 책임지며 처음에는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다가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던 줄리엣의 모습이, 처가집에 얹혀살며 휘둘리다가 자신의 길을 찾은 제레미의 모습이 마치 한병의 와인이 숙성되어가는 일련의 과정과 같다.
나는 이 영화와 함께 ‘도멘 루 페레 에 피스, 부르고뉴 샤도네이’ 를 마시고 싶다. 도멘 루는 영화의 배경인 꼬뜨 드 본의 ‘생 또방 Saint Aubin’ 지역에 자리잡은 가족경영 와이너리로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샤도네이가 유명한 도멘이기도 한 이 와이너리의 오너, 세바스티앙이 이번에 방한했을 때 우연히 식사할 자리가 있었는데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와인과 가족의 역사를 소개하던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와인을 시음할 때 우리 가족은 절대 뱉지 않아요. 할아버지에게 겁쟁이나 와인을 뱉는다고 배웠죠. 우리 가족은 와인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이 대사처럼 한병의 와인 같은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을 보며 더욱 애정을 가지고 와인을 마셔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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