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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컬처타임즈 Mar 27. 2020

[지해수의 연애칼럼] 그 나르시즘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좀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해봐야겠다. 물론 ‘연애’ 얘기이며 나-‘본인’의 이야기다. 어디에선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내용이기도 하다. 정말 사적이며, 듣는 사람 입장에서 좀 재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했던 친구가 있다. 자주 만나진 못해도 연락을 자주하는 친구였다. ...아마 벌써 ‘친구’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어떤 내용일지 다음 스토리를 예상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된다. 그렇다, 그 친구는 내 남자친구를 좋아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해줘서 알았다. 그럼 난 가만히 보고만 있었냐고? 그랬다. 전혀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를 가만 들여다보면 정말 이상하다!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길 극도로 겁낸다, 연애할 수 없어서다. 또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길 미친 듯이 원한다. 연애하고 싶어서다.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우리 사회의 연애는 그런 흑과 백 같은 느낌이다. 흑 아니면 백, 좋은 남자/여자 아니면 나쁜 새끼/년, 바람둥이 아니면 ‘모쏠’이다.

굳이 따지자면 내 친구는 둘 중 ‘후자’에 가까웠다. 물론 연애를 안 해 본 건 아니다. 그녀는 정말 오래 연애를 쉬고 있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입지를 견고히 해야 할 시기였고, 그럴 기회들이 그녀 앞에 찾아오고 있었다. 종종 그녀의 얼굴을 볼 때 당시 내가 사귀던 남자친구와 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내 남자친구들을 탐탁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 남자친구를 비하하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지금의 나였다면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며 기분이 나쁘다고 표현을 했을 거다. 왜 그땐 그러지 못했을까.

그러니 나는 그녀가 내 남자친구를 좋아할 거라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남자친구가 무지개색 머리였다고 치자. 그럼 그녀는 무지개가 싫다며 비아냥거렸고, 난 그저 그녀의 남자 취향인 줄 알았다. 친한 둘 사이에 좋아하는 스타일이 겹치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중엔 그녀가 내 남자친구에 대해 물었을 때 부정적으로 말할 것이 두려워지더라. 어느 순간부터 난 그녀에게 남자친구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너한테 잘 해줘?’라는 질문에도 별 자랑을 늘어놓지 않았다. 굳이 물어보면, 그에게 섭섭했던 일화 하나쯤은 섞어 말했다. 그가 이유 없이 미움 받기보단- 차라리 내가 조금 미워하는 쪽이 낫단 생각이었다. 물론 허공에 둥둥 뜨는 대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였지만. 그런데 미움은커녕 그녀는 당시 내 남자친구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려고 그런 과장된 표현을 한 거였다니.

만남이 끝난 후에야 알았다, 그녀가 그에게- 또 ‘그’였던 어떤 이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와 술을 마신 후에 나의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하는 걸 목격해 버렸다. 그렇게 그에 대해 비아냥대던 그녀의 입에서 그는 어느새 꽤 괜찮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한 번쯤 만나보고 싶어 한단 걸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만일 서로 좋다면 잘해보는 건 어때? 나랑은 이미 헤어진 지 오래야, 진심이야’라는 이야길 꺼내주길 바라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진심이지만 난 그런 말을 꺼낼 마음까진, 그런 마음을 가질 쿨함까지 가지진 않았다.

‘내 남자들’을 좋아하는 그녀는 의리 없는 나쁜 친구일까? 내 입장에선 기분이 유쾌할 일은 전혀 아니지만 ‘나쁜 친구’라고 까진 할 수 없는 것 같다. 적어도 그녀는 내가 연애 중일 때엔 그런 심경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 즉 좋아하기보단 싫어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나’라는 드라마가 보태어진 탓도 있다.

연애할 ‘겨를’ 없이 사는 그녀에게 내 연애사는 살아있는 ‘연애 드라마’였던 거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은 정말 ‘드라마’의 등장인물답게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외모나 로맨틱함 등을 장착하고 있다. 그녀에게 전달되어진 내 연애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도 그러했던 것이다.

‘이렇게 로맨틱한 사람이라니!’

시청자의 호기심을 증폭시키기 충분했다. 여자 주인공(이하 ‘여주’)의 감정에 이입되어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극 중 남자 배역에게 사랑에 빠져있듯- 그래서 극 중 배역을 맡았던 남자 주인공(이하 ‘남주’) 배우가 광고하는 백색가전이나 보험마다 어딘가 모르게 더 믿음이 가고, 음료마다 달콤하게 느껴지듯이... 그녀도 몰입되어 있던 거다. 하지만 그 남주가 다른 여자에게도 그렇게 시청자들을 감동시킬만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을까? 글쎄, 100%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선 상대방이 그 여주였기에 가능했던 거다. 마찬가지다. 그 여주도 그 남주를 만났기에 사랑에 충실했던 거다. 사람의 일생에서 이 정도로 사랑에 빠질 일은 다들 정말 손에 꼽을 정도라 생각한다. 심지어 둘 다 서로 좋아하는 경우는 더더욱! 그 남주가 사랑한 여자였기에- 그 여주가 사랑한 남자였기에 가능했던 드라마다. ‘그’였기에, ‘그녀’였기에 그런 드라마가 연출된 것이다. 

▲[Deux Personnages] 파블로 피카소 작(1934), 런던 소더비


내 친구는 나와 연애하던 내 남자친구가 ‘좋은 남자’라 생각하며, 그와의 만남을 상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설사 둘이 만난다할지언정 그녀가 상상하던 남주의 모습과 매우 다를 수 있다. 드라마에서보다 더 달콤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도 높다.

세상에 ‘좋은 남자’, ‘좋은 여자’가 따로 있을까? 어느 정도는 그렇고- 어느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좋은 여자-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내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선 소주 자리마다 안줏거리처럼 씹혀지는 ‘X년’일 수도 있는 거다. 상황마다, 사람마다 다른 걸 어쩌랴. 모두 상대방이 ‘나’이기에 벌어진 에피소드 들이다. ‘내친구’에게만 벌어질 수 있는 드라마는 또 따로 있을 거다(그 드라마를 함께 찍을 남주를 찾아 나서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또 누군가에겐 에피소드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나르시즘’이다, 정말 나름의 나르시즘! 각자 나름의 드라마가 있지 않나. 누군가와 연애할 겨를도 없이-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질 틈도 없이 일만 했던 그녀의 상황을 탓할 수 밖에.

종전 후 유럽의 MAY68(68혁명)을 거점으로 불기 시작한 작은 바람은 미국에 도달해, 전쟁 대신 평화- 그리고 사랑과 화합을 외치는 히피로 변하며 큰 바람이 되어 국내에까지 입성했다. 이 수줍고 남사스러워하기가 특기(?)인 민족에게도 ‘자유연애주의 사상’이 유행했더라는 것이다.

물론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에 시대의 목격자가 되지 못한다. 故 마광수 선생의 에세이를 보자면 당시 그가 대학을 다니면 7-80년대 대학가는 낮이고 밤이고 핑크빛이었던 느낌이다. 드러나진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꿀렁이는’ 느낌...

당시의 사회는 연애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개혁되어지는 모습이었다. 독재가 물러나고 낡은 것들이 뜯어 고쳐졌었다. 청춘들에겐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지와 희망이 있었다. 그들의 맘속엔 창조에 대한 욕구를 일렁이게 하는 ‘사랑’이 있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사랑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회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을 모아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희망이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최근 어느 인문학 강의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언급하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플라톤의 <향연>을 인용한 강의의 내용은 나중에 따로 다뤄야 할 것 같지만- 내가 바로 앞 문단에서 언급한 대로라도, 이 의견엔 동의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살던 시절에도 그러했고 현 시대엔 더욱 그러하다고 느낀다.

우리 사회는 점점 희망을 찾기 어려운 모습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한쪽에선 서로가 ‘남자’, ‘여자’라는 이유로 혐오하는 현상이 생겨나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었었다. 사회가 좋아져야 하는 건 우리 개인의 일상과 삶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프라이빗한 문제에도 은근한 관여를 할 만큼.

‘죽을 때까지’ 벌며 일해야 하는 백세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사랑할 ‘겨를’이 생기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다 각자 드라마의- 남주, 여주가 되어 아름다운 드라마를 펼칠 수 있길 바란다. 길어진 수명만큼이나-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쯤은 간직할 멋진 드라마들이, 한 두 세 개씩은 펼쳐지길 바란다. 몇 십 년 일해야 하는데 사랑도 못하면 억울하지 않겠어?

깊은 밤을 함께 걸으며 보이지 않는 서울의 별을 굳이, 굳이 찾아내며 ‘이쁘다’고 말하는 사랑이 마광수 에세이에서처럼 뭉게뭉게 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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