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별은 깔끔했지. 최소한 너의 입장에서는 말이야. 그런데 난 아니야. 이별 후 홀로 보내는 시간은 진창이었어. 축축하고 까칠하고 암울한 두려움이 가득한 시간이었지.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사라진 시간 때문에 절규했어. 네가 왜 떠나는지 이유를 몰랐으니까. 차갑게 돌아선 너를 향해 이유를 따지지도 못했어. 날 떠난 널 돌려세우고 싶었지만 두려웠어.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너의 차가운 얼굴을 쳐다볼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너와 헤어진 뒤 세상이 무채색이었어. 우리가 함께했던 찬란하고 따뜻했던 시간이 갑자기 허물어져 버렸으니까. 너와 소꿉놀이 하고 너와 마을 뒷동산에 올랐고, 너와 함께 산들거리는 코스모스 거리를 걸었어. 학교에서 돌아와 비석 치기도 함께 했고, 고무줄놀이도 함께 했었지. 여름 더위에 숨이 막힐 때면 함께 마을 저수지에 가서 수영도 하고 겨울이면 비닐포대에 짚을 넣고 눈썰매도 함께 탔어.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도 함께 갔지. 수업이 끝나면 우리 집 마당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소꿉놀이를 하며 오후를 보냈어. 놀다 배고프면 무화과를 따 먹고 늦어지면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었어. 우린 잠자는 시간 빼고 대부분을 함께 했지.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지몰라.그런일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다니 알 수가 없었어. 너의 이별 통보는 이해되지 않았어. 번개처럼 갑작스러웠으니까.
너를 떠나보내고 다른 친구와 어울렸지만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어. 아무리 애써도 네가 준 마음만큼은 받을 수가 없었어. 허망함이 밀려올수록 이유를 알고 싶었어. 왜 네가 날 떠났는지? 하루아침에 나와의 그 많은 시간을 싹둑 잘라버렸는지. 이해되지 않았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맞는 말일 거야. 갑자기 날 떠난 네가 미웠으니까. 좋아한 만큼 미움의 깊이가 깊다는 걸 그때 알았어. 다른 친구와 등교하면서도 마음은 텅 비어 있었어. 모든 신경은 오로지 널 향해 있었으니까.
그리움이 쌓여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었어. 그때부터였어. 깊은 우울이 날 지배하기 시작한 게 말이야. 사는 게 재미가 없어졌어. 무얼 해도 신이 나지 않았거든. 너와 함께 할 수 없는 시간도 고통인데 같은 교실에서 널 보는 것은 더 힘들었어. 이별 후 넌 내가 알던 네가 아니었어. 날 보고 웃지 않는 너, 싸늘하게 식은 너, 감당할 수 없었어. 날 떠난 널 바라본다는 건 지옥이었어. 마음이 아픈 날은 '어떻게 네가 날 떠날 수 있어?' 원망을 쏟아냈어. 그건 새어 나오지 못한 비명이었어. 아무리 용을 써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내내 아팠어.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간을 떠올리면 가슴에 찌릿한 통증이 몰려와.
넌 말이야.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단발머리에 조용한 아이였어. 널 생각하면 네가 주로 입었던 분홍색에 흰 물방울이 점점이 찍힌 블라우스가 제일 먼저 떠올라. 시골에서 잘 사는 집안의 딸이었던 넌, 서울 아이처럼 흰 얼굴에 빛나던 아이였어. 쾌활하고 덤벙대던 섬머슴 같은 나와 반대였지. 넌 키도 나보다 5센티미터나 더 컸어. 거기에 행동도 신중했고 어른스러웠어. 마음 씀도 예뻐서 때론 언니 같다 생각하곤 했지. 넌 참 잘 웃는 아이였어. 웃을 때는 대부분 소리 없이 웃었는데 주로 미소로 대신하곤 했지. 날 보며 짓는 미소 때문에 널 좋아하는 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맘에 드는 미소였어. 그런데 넌 문득문득 웅크리며 조용해지기도 했어. 저러다 땅속으로 꺼져 버린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지. 네가 가지고 있는 침묵이 무서웠거든. 깊은 우물에서 널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그럴 땐 넌 나와 다른 층위의 사람 같다고 생각했어. 가끔은 그런 점이 멋있게 보이기도 했어. 나에게 없는 묵직함이 깊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 너를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잃어버렸어. 세상이 무너졌지. 좋아하는 이가 어느 날 문득 등을 보인다는 것은 공포야. 너와 헤어진 뒤 세상이 날 버렸다고 생각했어. 무거운 어둠이 날 감싸고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은 듯 두려움에 떨었지.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른 체 버려진 느낌은 패배감이야. 깊은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어. 어쩌면 지금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는지 모르겠어.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니까.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우리가 다시 만났지. 서먹한 감정이 남아있던 순간, 이별 이유를 물었어. 한참 망설이다 상처를 말했지. 우리가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이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라니 속이 상했어. 그렇지만 넌 그 상처로 지옥을 경험했음을 알았지. 가장 친한 나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아픔을 말하는 널 안아주고 싶었어. 넌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 있었는데 어린 난 널 원망만 했구나 싶었지만 선뜻 안아주지 못했어. 헤어진 만큼 우리의 간극이 커졌음을 그때야 알았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우린 인사를 나눴지. 아팠을 너를 이해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였어.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어. 상심이 어린 널 가둬버렸구나 싶었어. 어린 네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아픔으로 고난했을 어린 너를 떠올렸지. 차라리 속시원히 말했다면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