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어디든 떠나고 싶은 날이다. 봄날의 끌림이전혁림 미술관으로발길을 옮기게 했다. 도착 후 한가한 전시실에 들러 맘에 드는 그림 앞에 섰다. 그림에 빠져든 순간 설렘, 침잠, 떨림 숨 쉬는 모든 감정들이 순식간에 살아 꿈틀댄다. 평일이라 관람객이 없는 전시실을 유유히 만끽한 후 <봄날의 책방>을 찾았다. 책방이 눈에 쉽게 띄지 않아 미술관 직원에게 물어본 후에야 책방으로 향했다. 건물 밖에서 보면 과연 책방이 맞는가 싶은데 안으로 들어가니 절로 입이 벌어진다. 노란 벽에 푸른 문,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넝쿨과 윤이상, 김춘수, 유치환의 얼굴과 문장이 적힌 벽면에 끌려 나도 모르게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옥집의 기본 틀은 그대로인 채 개조한 공간이 보인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구성이 멋스러웠다. 적절한 포인트에 놓인 그림과 꽃, 벽면에 쓰인 작가의 문장, 자그마한 창문에 놓인 앙증맞은 화분, 아이들 책을 따로 전시해 둔 푸른 바닷속 동화 같은 방안, 파란 하늘을 닮은 방안 모퉁이에 놓인 전등, 노란 전등 빛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따뜻해진 마력의 공간, 아이들 키높이에 맞춘 작은 앉은뱅이 의자, 문을 열면 푸른 바닷속을 통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신비로운 푸른 문,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액자, 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을 법한 주인이 사용했을 것 같은 수동식 미싱, 천장 밑 자투리 공간을 비워두지 않고 인형과 엽서로 채운 센스, 책방 하나하나가 가슴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가슴을 건드린 건 독서에 빠진 중학생일 법한 한 여학생이다.
햇살 가득 펼쳐진 창문 아래 깊숙이 앉아 책 읽기에 몰입한 여학생이다. 마치 건물이 지어질 때부터 하나인 듯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느릿하게 책방 안을 다 둘러본 후에도 여전히 책에 빠져 있던 여학생이 단박에 눈에 가득 들어온다. 아껴 두고 보고 싶은 풍경이다. 잠시 후 여학생은 딱 봐도 옛날 책인 듯한 책을 엄마에게 꺼내달라 청한다. 엄마의 손에서 책을 받아 든 학생은 한참이나 책을 살펴보았다. 딸의 엄마인 듯한 어른이 딸에게 물었다. "어때? 책이 맘에 들어?" "좀 어려운 것 같아. 실은 이건 박완서의 초창기 작품인 것 같아 관심이 가서 말이야." 딸이 말했다. "그럼, 넌 이 책을 사고 싶은 거야? 한자도 제법 많구나. 한자를 몰라도 읽기에 괜찮을까? 이 책을 사는 게 맞을까?" 엄마는 딸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딸은 아무래도 욕심인 것 같다며 다시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모녀의 대화를 들으면서 딸 의견에 대한 존중과 선택권을 준 엄마의 대화 방식이 멋스러웠다. 모름지기 어른이란 이래야지 싶어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들 모녀를 보면서 나의 대화법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연처럼 찾아들어간 <봄날의 책방>에서 필연처럼 앉아있는 여학생과 가을이 물들기 시작한 동화 같은 풍경 덕분에 떠나지 못해 한참이나 책방에 남아있었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연두빛의 풍요처럼 풍성하게 찾아든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