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경남 하동군 화개면)은 꽃 피는 땅이다. 그 골짜기에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꽃이 없더라도 그 땅은 이미 꽃으로 피어난 마을이다. 세상이 아닌 곳으로 가려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여서, 이 골짜기에서는 신령한 일들이 많았다. 낮은 포근하고 밤은 서늘해서 늘 맑은 이슬이 내린다."
『자전거 여행』
소원 등이 꽃처럼 아름다웠던 쌍계사를 방문 후 걷기 위해 섬진강으로 향했다. 송림공원에 차를 주차하고 모래언덕 위 소나무 숲 하동 송림에 들어선다. 입구에 들어서자 소나무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눈을 감고 소나무 향을 세포 구석구석까지 밀어 넣고 나서야 눈길을 돌렸다.
조선 영조(1745)에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심어졌다는 750그루의 노송이 눈앞에서 꿈처럼 펼쳐졌다. 노송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김훈 작가가 말한 '하동의 신령한 일'이라는 게 이런 풍경이 아닌지 추측했다. 풍경과 소나무 향에 취해 최대한 천천히 소나무 숲길을 걸은 후 다시 섬진강으로 향했다.
섬진강의 모래를 맨발로 걸었다. 메마른 모래가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혔다. 생생하게 감각이 깨어났다. '크!'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비릿한 강내음이 물살을 타고 불어왔고 봄바람은 따사로웠다. 모래밭이 끝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올라섰다. 쓸모가 사라진 기찻길을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개조한 다리다. 기차가 다니는 길을 기차가 아닌 사람이 걷다니.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다리를 달리던 기차는 어디로 간 걸까?'
'쓸모가 사라진 것들이 간 곳은 어디일까?'
'나도 언젠가 쓸모가 사라지겠지. 그때의 나는 어떤 마음일까?'
쓸모 있는 것들의 사라짐을 생각하다 며칠 전 정년퇴임한 국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 인사를 하기도 전에 눈가가 이미 촉촉해진 그다. 힘들게만 느꼈던 일상을 접는 게 시원하겠지만 활기찬 일상이 문득문득 그리워질 거라고 눈빛이 말했다. 20년 넘게 쏟은 지난날을 승화하기 위함인지 그가 손수 춤과 노래를 준비해 마지막 열정을 쏟아냈다. 온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정성스럽게 춤을 추웠다. 열정과 정성을 담은 그의 무대가 아름다워 울컥했다. 아쉬움 가득한 무대였다는 말에 마지막 헤어짐은 아쉬움을 담보로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했다.
다리를 빠져나와 다시 해안길을 걸었다. 강가 모퉁이에 고기를 잡다 지쳤는지 망중한에 빠진 왜가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정지 화면인 듯 한참을 강가에 서 있는 왜가리를 보며 생각했다.
'가끔은 일상을 놓아버리는 것도 답이다.'
회사일을 하다 생각이 많아지면 두통이 찾아왔다. 깊게 생각할수록 생각은 실타래처럼 꼬여 복잡해졌다. 결국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부정의 늪에 빠졌고 혼란스러웠다. 그럴 때면 멈춰야 답이 나왔다.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비우고 긍정으로 다시 세팅했다. 그럼에도 정리되지 않는 날이면 오늘처럼 걸었다. 자박자박 발끝에 집중해 걷고 나면 삶이 단순해졌다. 걷고 나면 저절로 답이 나왔으니 걷는 건 살아내기 위한 방책이었다.
걷기가 종착지에 다다를 즈음, 어촌 마을 선착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녹슨 고깃배를 만났다. 바다로 나가기엔 역부족인 낡은 배다. 할 일을 잃어버린 퇴역군인처럼 노쇠한 고깃배를 한참 바라봤다. 쓸모가 사라진 낡은 고깃배 옆 부두에 낡은 배의 세월만큼 늙은 어부가 눈에 들어왔다. 굽은 등, 굵은 손마디, 깊게 파인 주름살이 햇살을 받아 선명해졌다.
'누가 먼저 바다를 놓아버린 걸까? 어부가 없어 바다로 나가지 못한 고깃배가 부두에 앉아 어부를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걸까? 아니면 고장 난 고깃배 탓에 늙은 어부가 바다를 놓아버린 걸까?'
어쩌다 나는,
'퇴역 군인처럼 할 일을 놓아버린 고깃배가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지? 고독에 빠졌는지?'
모를 일이 되어 고민에 빠졌다.
쓸모를 다한 고깃배의 긴 그림자가 바다를 등진 채 길게 늘어졌다. 고깃배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바다는 조용히 물살을 실어 날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