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는 치매 3년 차가 되었다. 뇌졸중과 함께 온 치매로 거동을 할 수도 없었다. 호흡기를 코에 꽂고 있는 고모는 몸도 얼굴도 야위었다. 60을 넘긴 오빠는 90을 넘긴 노모를 위해 간병인 자격증을 땄다. 코로나 시대에 요양병원에 가면 면회도 못 하고 죽을까 염려된다며 거실에 침대를 두고 산소호흡기와 온갖 약들과 의료보조기를 두고 병구완 중이다.
“고모. 아들이 참 효자여”
“음 자가 착혀. 누구한티 거시기한 소리는 안 들어.”
“오빠가 나한티는 거시기 하던디”
오빠의 까칠한 성격은 집안사람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랬던 오빠는 늦은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낳고, 고모가 아프면서 세상 다시 없는 아들이 되었다. 고모의 세 아들 중 유일하게 고모 곁에 남아있는 아들이기도 하다. 치매에 뇌졸중 합병까지 있는 환자를 돌보는 고단함도 없어 보인다. 늙어가는 아들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고모의 웃는 얼굴이 애련하다.
지금은 ‘창성동시대’를 살고 있다고 했다. 창성동 시대가 언제냐고 묻는 우리 자매들에게 오빠가 어려서 살았던 곳이라 했다. 아들 셋과 선비 같았던 고모부랑 살았던 시절. 고모는 그 시절 속에서 간간이 웃었다. 시골집에 가고 싶지 않냐는 물음에는,
“아이고, 가봐야 심난허다.”라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말에도 우리는 크게 웃었다.
“그 집에 마늘 먹은 고라니가 살어” 삼 년 전 가을 고모가 수확해 놓은 시렁 위 마늘을 겨우내 고라니 한 마리가 살면서 다 먹어 버렸다.
“우리 고모 말짱하네!”라는 말이 돌림노래처럼 계속됐다. 아픈 데는 없냐는 말에도 그냥 견딜 만큼 아프다고 답했다. 트랙터에 손이 빨려 들어가 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 의수를 했을 때도 “요즘은 기술이 좋아 내 손을 처녀 손으로 만들었다.”며 웃어 보이던 고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