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이 살짝 당기는 날에
알코올이라는 물질 자체가 발화성을 지닌 액체지만 그것이 정신에 일으키는 영향도 물의 평정과 불의 격동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어령의 '읽고 싶은 이어령' 중에서 -
금요일 저녁이다. 알코올에게서 오는 평정과 격동을 동시에 하고 싶은 저녁이다. 해는 뉘였 뉘였 세인트 킬다 바닷가 저 너머로 저물고 하늘은 수줍게 분홍색을 띤 구름과 함께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노을을 선사한다. 지금 바로 그런 저녁이다.
한두 달쯤 보지 못 한 친구를 만나는 저녁이기도 하다. 우리는 같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친구가 되었다. 먼저 승진을 한 친구는 나의 매니저로, 나는 그의 교육생으로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동급이다. 그래서 만나면 하는 얘기가 거의 일 얘기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봐도 잠깐 삼천포로 빠졌다가 돌아오면 다시 우린 일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친구 얘기를 조금 하자면, 맛집이나 괜찮은 장소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친구다. 그래서 그를 만날 때면 그가 안내하는 곳 어디든지 군말 않고 따라간다. 오늘도 역시나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마티니가 당기는 불금에, 끝내주는 노을이 지는 그런 저녁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레스토랑 겸 바 겸 카페다.
멜번 시내에 있는 플린더스 역에서 센드링햄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삘 나는 기차를 타고 10분 정도 걸렸나? 다섯 정거장을 가면 나오는 곳이 발라클라바 역이다. 바로 내 친구 녀석이 살고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발라클라바 역에서 서쪽을 향해 걷다 보면 멜번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세인트 킬다 바닷가를 만날 수 있다. (해 질 녘 세인트 킬다 바닷가의 풍경은 누구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 그리고 해가 질 때를 딱 맞춰서 가면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펭귄 친구들도 만날 수 있다; 남극에 있는 큰 펭귄이 아닌, 웅크리면 배구공 보다 작은 아주 귀여운 아이들이다.)
마티니를 한 잔, 두 잔 걸치며 함께할 수 있는 기가 막히게 괜찮은 음식들도 많았다. 그중 나는 두 가지 요리를 선정했다.
그릭 요거트로 만든 요상하게 자꾸만 손이 가는 소스에 찍어먹는, 메이플 시럽을 마무리로 뿌려 달달한 맛까지 가미한, 가지로 만든 칩(맥도널드 감자칩 같이 생긴, 맥도널드 감자칩보다 3~4배 두꺼운 칩).
타르트 소스에 찍어 먹으면 끝내주는,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살짝 옷을 입혀 튀겨낸 부드러운 오징어 튀김.
(사실 저 음식들을 만나자마자 정신없이 먹어 치우느라 사진 찍을 찰나를 놓쳐버렸다. 다음 번에 가면 멋있게 찍어 올리겠노라 다짐한다.)
에스프레소 헤이즐넛 마티니를 너무도 맛있게 마신 후, 커피가 들어간 마티니를 한 잔 더 하기란 괜히 있지도 않은 불면증을 사서 걱정하며, 다음 잔은 어떤 마티니로 할까 고민 고민하나 고른 녀석이 달달한 무화과 마티니다. 뭐 사실 내가 직접 골랐다기 보다는 내 친구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에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정할 수 있었다. (다음 번에 나와 함께 누군가가 온다면 꼭 추천해 주고 싶은 녀석이다.)
마티니 잔 가에 멋들어지게 붙어있는 하얀 초콜릿 가루들을 먹어주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만든 이의 마음이 서운해질까 봐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살짝 살짝 잔을 돌려가면서 다 먹었다. 먹고 난 후에 나도 뭔가 모를 만족감에 든든했다.
그렇게 잔을 기울이고 비우며 우리의 밤은 점점 깊어갔다.
- Epilogue -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친구 녀석이 자신의 폰을 내 카메라 앞에 장난스레 가져다 놓는다. 내가 장난기 넘치는 말투로 버럭 버럭 거리니 내 친구는 맛이 들어 더 짓꿋게 달려든다. 이러면서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시간이 괜찮은 추억이 되고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되었다.
By Minnie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