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르프 신입 교사의 고군분투기
발도르프 영어 교사가 된 지 딱 한 달이 되었다.
서울과 충남 예산을 오가면서
초등학교 1~6학년 수업을 하고 있는데..
4주 차 수업을 마치고 와서 몇 자 적는다.
*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다.
"옥돌이는 다재다능하니까,
초등학교 선생님 하면 딱이겠다."
괜히 부모님이 원하는 꿈이어서였을까.
교대를 가서 선생님이 되는 길에는 도무지 끌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시 때,
주변에서 정말 많은 친구들이 교대를 준비했다.
그 선생이란 직업이 뭐길래,
저렇게까지 치열하게 준비해야 하는 건가..
오만방자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모든 업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데 말이지..)
*
돌고 돌아,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런데, 공교육 교사가 아니다.
대안학교 교사다.
사과꽃발도르프 학교
충남 예산에 위치한 조그만 학교다.
작년 하반기에 예산에서 잠깐 지냈다가,
연이 닿아서 이곳에서 영어 교사를 하게 됐다.
그리고..
매주 이틀씩 예산에서 지내는
5도2촌 라이프를 시작하게 됐다.
*5도2촌
주 5일은 도시, 2일은 시골에서 지내는 라이프스타일을 일컫는 말.
비중에 따라 '5촌2도'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는 건,
사실 처음이다.
운좋게도, 굉장히 쉽게 영어교사로 합류했다.
외고를 졸업했고,
서울 소재 대학 어문계열을 졸업했고,
호주에서 지낼 때 Tesol(영어교사 자격증)을 따놓았던 터라..
그리고 주 2일.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만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수업을 하고 있다.
*
발도르프 학교에는 교과서가 없다.
영상, 음악을 비롯한
모든 미디어 사용도 금지다.
그럼 어떻게 수업을 하냐고?
외국어 수업의 경우, 해당 언어로만 진행된다.
아이들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외국어 교사는 외국어만 사용할 것이 권장된다.
(아이들 앞에서는 영어만 사용하거나, 입을 닫고...
신비감을 유지하고 있다. 아직까진^^)
수업에서는 "교사의 입말"이 주된 도구다.
특히 외국어 수업은
아름답고 정확한 발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아이들은 교사를 통해 해당 언어와 문화를 만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디어 없이..!)
*
오로지 입으로만 때우는(?) 수업을 마치고 나면,
정말이지..
7번의 공연을 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기분이다.
피아노 연주했다가
기타 들고 이목집중 시켰다가
노래 불러줬다가
이야기 들려주면서 연기했다가
야외수업 나가서 인솔하고..
ㄹㅇ 개힘들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된다.
그런데,
행복하다.
즐겁다.
진심이다.
이 아이들이 정말로,
재미있게 영어 세상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수업을 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움에 있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표정과 행동을 살핀다.
"사과 = apple이야!!!!"
식의 교육이 아닌,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고, 상황을 만들고,
모호함을 견디는 시간을 내어준다.
*
신입 영어교사 4주 차.
부모님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온다.
"영어에 전혀 관심 없던 애인데,
발음이 궁금하다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영어 수업이 너무 재밌대요."
"학교에 단점이 없대요. 다 너무 좋대요.
아침마다 영어 수업 때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니까요."
"화요일이면, '영쌤 오는 날이다!' 막 그래요."
영어 수업을 재밌게 듣고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개인적인 목표는 달성이다! (감동)
*
내 수업을 듣는 아이들이
영어를 뛰어나게 잘하길 바라지 않는다.
주구장창 단어를 암기하길 바라지 않는다.
한 문제라도 더 맞아보겠다고 애쓰길 바라지 않는다.
(발도르프 학교는 '시험'의 개념이 없긴 하다.
교사 재량에 따라 퀴즈 등을 진행할 수는 있어도..!)
그저 영어를 만나는 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영어라는 외국어에 반감을 가지지 않고,
앞으로 긴 여정이 될 영어를 여행처럼 즐겼으면 좋겠다.
시험 한 문제 더 맞히기 위한 공부가 아닌
'국가'라는 바운더리 밖 세상을 만나고,
'외국인'과 언어로써 소통하는 짜릿함을 경험하고,
세상을 '대한민국'에만 한정 짓지 않았으면 한다.
*
외국어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와 같다.
(열쇠가 많으면, 내가 볼 수 있는 세상도 훨씬 더 넓어지는 것..!)
그 맛을 알아버린 나는..
자연스레 외고에 진학했고, 대학에서 어문계열을 전공했고,
각지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영어를 재밌게 배우지 못했다.
학원에서 단어 한 문제 더 맞히는데 급급했고
내신이 잘 안 나오면 외고에, 대학에 못 갈까 봐 끙끙댔고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과목으로 여겼다.
*
새로운 언어를 만날 아이들은 제발,
즐거운 마음으로 외국어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자유분방한 수업이 공교육에서는 쉽지 않을 터..
'대안학교라서 가능한 거겠지..?' 싶다가도
이렇게 좋은 교육을 많은 아이들이 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적어도,
내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겐
열쇠를 찾아 떠날 용기를 손에 쥐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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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옥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