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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진주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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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Dec 04. 2024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한동일



      

가끔 책을 잘못 고르는 경우가 있어요. 작가를 착각하거나 제목이 헷갈리거나 말입니다. 이 책 역시 작가가 익숙해서 아는 작가일 거라 여기고 하필 종교 코너에 있어서 기독교 관련 책이라 당연시하고 빌려오게 되었답니다. 


책장을 펴는 순간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음을 인지하고 다만 익숙한 작가님은 맞았어요. 베스트셀러로 많이 읽힌 라틴어 수업에 저자이셨으니깐요. 허나 그분이 사제였다는 것과 기독교가 아닌 천주교 관련 책이었다는 것에 잠깐 읽을까 말까 고민했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시니 작가님의 필력을 믿고 한번 읽어보기로 합니다. 익숙한 기독교 용어와 사뭇 다른 천주교 용어가 헷갈리기는 했지만 종교적 신념이 저와 결이 맞으셔서 묵상을 하듯 읽은 이야기 오늘 들려드릴게요.


모태신앙으로 45년간 그리고 반주자로 거진 30년의 세월 동안 교회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20대 초반 사춘기처럼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듯 1년간 반주를 쉰 시간 외에는 말이죠. 오히려 떠나온 1년의 시간이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시간들에 대한 반증이 된 셈입니다. 


40대 전후로 인생의 질곡을 지나며 잠깐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없지 않았지만 저는 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연약함과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역시나 연약한 인간임을 알기에 잠깐의 회의감만 품고 끝났습니다. 아마도 오늘 제 신앙고백적인 내용이 될 거 같네요. 


반주자로써 예배를 섬기는 자리에 있어서인지 상한 마음으로 교회를 가는 것이 마음이 무거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일주일간 세상 가운데 주의 은혜로 잘 살아왔노라 잘했다 도장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가는 양 말이지요. 아마도 교회에서 섬기는 자리에 있다 보니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간다는 것이 죄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봉헌물은
'매일 매 순간 결심한 것들에 대한 반복된 실패'일 거라고요



이 문장에 어찌나 환호성이 질렀던지요. 그래, 바로 이거지. 부서지고 짓이겨진 마음을 그 어느 누구한테 내보일 수 있느냐 말이지요. '주께서는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나를 가장 잘 아시는 그분은 신일 텐데, 그 신 앞에서 어찌 내 마음을 꾸미려 한단 말인지요.


기쁘면 기쁜 대로 상하면 상한 대로 그 어떤 마음이던 내비칠 수 있는 존재는 신이 아니던가요?


어느 순간 신이 아닌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의식이 되어 평안인 척 교회를 드나들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매일 실패하고 매 순간 꺾어집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다음이 있고 내일이 있고 다시라는 것이 있는 한 우리는 괜찮습니다. 신이 그렇게 만드셨으니깐요. 그리고 신은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선물도 허락하셨으니 말입니다.


오늘 무너져도 내일 일어설 수 있는 것, 그것이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줍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분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은총이 가득한 사람은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신은 없는 것을 바라는 존재가 아닌 있는 것을 주심에 감사할 존재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그 주머니를 채워줄 분으로 신께 접속을 하는 저인데 있는 것에 족한 줄 알라는 말씀이 상투적으로 제 마음을 울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없는 것이 아닌 있는 것 받은 복을 헤아려 보기도 합니다.


가득해서 비어 보이지 않으면 비었다 채워지는 은혜를 결코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께서는 저에게 채워지는 은혜의 현장을 목도하게 하시므로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에 대한 훈련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으면 불안한 연약한 인간인지라 바로 좌절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께 의지하는 인간이도 합니다. 



현대의 영성은 마음이 가난하고 산란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일 것입니다


옛적 신은 우리의 배를 채우기 위한 존재였다면 지금의 신은 우리의 빈한 영을 위해 존재합니다. 육신의 배고픔과 영의 배고픔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부른 배가 있기에 채워지지 못한 영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시린 영과 굶주린 영은 그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이신 그분을 찾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지금 시대 전도라는 것은 신의 존재론보다는 교회의 존속을 위한 다단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머릿수만 채워서 많은 머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신이 기뻐하실까요? 단언컨대 백 명의 머리보다 한 사람의 통회하는 심정을 신은 기뻐하실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교회는 신이 가장 크게 감당하실 수 있는 것을 상실했을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십자가의 위로 그리고 십자가의 부르심을 말입니다. 


신이 잘못일까요? 신을 섬기는 자들의 잘못일까요? 유행을 따라 쫓는 인간의 잘못일까요?


그가 이 시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을지 그 이야기를 대신 전달하는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한 그분의 제자들이 올곧게 전파해 주길 바랄 뿐입니다. 아마도 저자는 사제직을 내려놓고서야 그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진짜로 전해줄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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