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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Dec 06. 2024

작별하지 않는다



      










고통의 심연, 그 깊이를 감히 누가 알 수 있을까? 고통의 자리를 건너온 사람도 고통이 지난 후 머물던 고통의 기억을 마주한 이들마저도 고통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떠안나고 살아가는 자의 혈연도 그 피가 끊임없이 수혈된다. 고통의 피가 말이다.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고통의 피를 수혈당한 채 살아간 이들의 기록이라고 할까? 그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이들의 몸짓 언어라고 할까? 그 언어들이 난무하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과연 고통의 서사이자 몸부림의 언어이다. 지난 자리에 더 깊은 상흔을 남기고 기어이 지워지질 않은 문신처럼 고통을 새긴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거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빡이는......


"인제 오빠 머리 안 이상함지"라는 말을 평생 묻어두고 오빠의 유해를 찾기 위해 태어난 양 총기 어린 동생은 생의 전부를 지워낸 그 자리에 고통의 자리만을 남겨둔 채 그 고통의 유산으로 남겨질 딸 인선에게 구해달라 애원한다. 구하길 원했고 구해야 했으나 그러질 못한 자리를 그렇게 딸에게 전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역사는 기록에 남고 그 기록에 대한 회고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단숨에 사라진 그들을 기억해 줄 이는 혈연일 뿐이고 그 기억을 눈으로 목도한 자들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역사를 수면에 띄워 그 고통에 마중물 역할을 하는 자가 있을 뿐. 독자로써 우리는 그 고통을 눈을 통해 읽어내고 그 역사에 대한 재편을 이루어낸다. 그렇게 고통의 자리에 있었을 그리고 여전히 고통당하는 그들의 혈연에게 조금의 애도를 품게 하는 것, 그렇게라도 고통의 자리가 애도의 물결이 되게 하는 것이 최소한 우리의 몫이 아닐까 싶다. 



사랑의 소설이 되길 바란다는 작가의 마음은 아마도 애도라는 형태를 취한 사랑의 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애도라는 건 죽은 이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상실의 마주함일 테니 말이다. 



늦가을 낙엽이 지기도 전에 낙엽을 게워내기 위함인 듯 무섭게 내린 첫눈을 목도하며 책 속에서 마주한 눈이 이 세상눈이 아닐듯한 희고도 너무 희어진 눈과 오버랩이 되었다. 첫눈이 내리는 날 혹은 설경에서 읽으면 그 흰 눈이 아찔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과 눈이 겹쳐진다. 안타까운 영혼을 이토록 힐 수는 없을 눈이 핏속에서 더 존재감을 들어냈을 것이다.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벡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즉었구나,
생각을 했주.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고통의 흔적을 지울 양 흰 눈은 자신의 존재를 더 희게 부각시켰을지도 모르고 차디찬 곳에 단 한발의 총성으로 고꾸라졌을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줄 수분을 먹지 않은 가벼움으로 그들을 따스하게 덥어줬을지도 모를 흰 눈의 의미. 소설을 읽으며 희고 흰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어쩌면 그 눈 때문이었을까? 애초에 그들과 함게 했을 최소의 목격자이자 증거인으로 말이다. 



단연 돋보이는 섬세한 문체와 연필을 꾹꾹 누르며 진하게 씌었을 거 같은 느낌을 주는 문장에 압도되어 멈칫하게 되기도 하지만 아주 작고 여리지만 날카로운 메스의 느낌을 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알싸한 감정을 독자에게 건네는 작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알싸함이 미묘하게 불쾌함으로도 다가오는 것이 독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아주 필요할 땐 알싸하면서도 미묘한 불쾌함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수용하고  포개게 한다.  그 미묘한 불쾌함을 너끈하게 받아들일 아량이 삶의 청량함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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