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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수니 Jul 21. 2021

인생 치트키를 찾았다.

마음을 내려놓으면 저절로 해결이 될지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우당탕탕이라는 느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다들 평탄한 길을 걷고 있어 보이는데 나는 땅에서 구르고 우박이 내리는 데다 길까지 진흙탕이다. 고인 물에 비친 내 모습은 너덜너덜 그 자체다. 마침내 포기하고 '그냥 되는대로 가자.'라고 다짐을 하면 신기하게도 어느 날 무지개가 떴다. 뜻하지 않게 상황들이 저절로 풀리는 것이다.



첫 번째 시련은 수능이었다. 두 번째 보는 수능이었는데 외국어 영역 마킹을 10문제나 못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추가로 1년간 공부하며 능력과 함께 실수도 같이 갈고닦은 것이 분명하다. 이때 나는 사람이 찐 절망에 빠지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됐다. 후회만 한가득 할 줄 알았는데 깜깜한 미래에 압도당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다. 고졸이란 현실 앞에 모 먹고살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저 멍했다. 

던킨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물걸레로 바닥을 닦으면서 내 바닥인생을 마주했다. 대학교는 가지 않고 던킨 지점장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성적표를 찾으러 갔던 친구가 사진으로 내 성적표를 찍어서 보내줬다. 웬일. 영어가 3등급이었다. 예비번호를 받고 맘 졸이다 겨우 입학했다. 


두 번째 시련은 회사였다. 처음에 빤스 런을 했어야 했는데 눈치가 없어서 그러질 못했다. 팀장을 단단히 잘못 만났다. 회사 내 3대 사이코 중 한 명이었던 데다 처음으로 팀장이 되었다. 직책은 팀장인데 마인드는 신이었다. 일부러 야근을 시키기 일수인 데다 심지어 퇴근하고 찜질방을 가자던지 영화를 보자고 했다. 결혼한 남자 팀장인데 말이다. 그 뒤로도 별일이 많았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진급 누락이었다. 1년 경력만 채우자던 목표를 1달 남기고 미련 없이 포기했다. 타 팀으로 옮겼다. 

동기들보다 억울하게 1년이 뒤쳐진 것에 한동안 속상했지만 다행히 좋은 팀장님을 만나 1년간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두 번째 진급심사가 있기 1주일 전이었다. 전 남자 팀장은 성추행 사건으로 징계를 받았다. 지난 진급 누락도 재검토 받아서 동기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승진이 되었다. 불과 1주일 전엔 상상도 못 해본 결과였다.


세 번째 시련은 인연이었다. 20대 후반, 친구들은 다 연애를 하고 있었다. 즐겁자고 만날 때마다 연애는 안 하냐는 안부도 점점 피곤했다. 꽤 오랜 시간 인연을 찾아 헤맸다. 소개받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내 인내심은 바닥을 향해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란 확신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즈음부터 주변에서 드디어 남자친구 만나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얼굴에 꽃이 피었다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혼자임에 만족하는 내 감정이 찐이구나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나랑 연애 중이었나) 

한동안 연애 할 생각없이 지내다 지금의 남편을 여행에서 우연히 만났다. 거주지 거리가 멀어서 연애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결혼까지 하게 됐다. 

위의 3가지 일들은 적어도 내가 인생에서 모두 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이었다. 내가 잘 해내고 싶을 땐 상황들이 날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다 내가 마음을 내려놓으면 어느 날 알아서 해결이 됐다. 물론 그 어느 날이 금방 오지는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엇박자 같은 일이 생기는 걸까. 나랑 밀당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아마도 여유의 힘인 것 같다. 상황에 따라서는 체념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유와 체념에는 공통점이 있다. 꽉 채웠던 에너지를 비우면서 여유가 생기고, 전념을 했었기 때문에 체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유, 체념은 어떤 것에 흠뻑 빠져있었어야지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언뜻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언제 이 단어들을 쓸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체념이 마음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이라면, 여유는 좀 더 느긋한 마음이 된다는 차이가 있다. 


여유의 작동원리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여유를 갖게 되면 마음에 공간이 생기게 된다. 그 여유공간에 다른 것들이 조금씩 들어온다. 다양한 경험들이 생기는 것이다. 오로지 목표만 붙잡고 있었던 조바심이 줄어들면서 긍정의 선순환이 일어난다. 이렇게 상황이 저절로 풀리는 것 아닐까.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영양분을 축적하는 것과 같다. 쫓기는 마음으로는 멀리 갈 수 없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상황이 저절로 좋아지기까지 꼭 시간이 걸렸다. 조바심을 버리고 여유로운 현재를 보내다 보니 변화를 맞이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생 치트키를 발견한 기분이다. 무조건 여유만 갖고 살면 될 것 같지만 문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여유는 몰입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리저리 부딪치고 깨지면서 내가 성장해 나갈 때 툭하고 인생이 던져주는 선물 같은 것이다. 치열하지만 조급함은 없어야 생기는 것이 여유다. 오늘도 실패한 것 같고 내일도 망한 것 같다면 조급함을 버리고 다른 일도 하면서 보내자. 여유라는 것은 게으르다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다음 단계를 위한 소중한 공간이다. 지금은 틀딱인 미래인 것 같아도 상황이란 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것을 잊지말자. 코로나가 갑자기 온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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