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이야기 #6
이 사소한 의문은 2004년 부산에서였다. 비가 많이 오던 그 날. 급경사의 가로변 우수받이 뚜껑이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본 직후였다.
이집트의 옛 정원 속 연못과 수로들은 ‘보이는 물 '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물’일까? 거친 자연환경에서 나무와 꽃을 가꾸던 경관시설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한 필수시설이었을까.
물의 정원은 연못, 분수, 수로 등의 물을 이용해 구성되는 특정한 정원 형태를 말한다..... 서양은 분수나 수로와 같이 물을 끌어들이고 뿜어내게 만드는 물의 정원 디자인이 크게 발전했다. 그런 고로 서양문화 속의 물의 정원은 물을 끌어오거나 흘려보내야 하는... (정원의 발견 ‘물의 정원 다자인 하기’ , 오경아. 네이버 캐스터)
'보이는 물'들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발전적 진화를 했지만 보이지 않는 물과 이별한 상태는 아니다. 이 분수의 수조들은 빗물을 담아야 했고 넘치면 흘려보내야 하는 우수 배제의 역할도 했다. 그러니 아직 완벽한 이별이 아니다.
이별의 시작
이별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대중 소비의 시대를 거치면서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도시의 유지를 위해서 당장 필요한 것은 물의 통제와 관리였다. 먹을 물을 공급하고 홍수피해의 대비와 함께 넘쳐나는 오물을 빨리 배제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인류의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인 상하수도의 탄생이다. 예전처럼 보이는 수로 몇 개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흐르고 투영하고 소리 내는 등 중력에 따라 순응하는 물의 원초적 속성에 감탄하기보다 한꺼번에 몰아쳐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는 무시무시한 ‘보이는 않는 물‘의 힘을 두려워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땅 밑으로 그 물들을 모아서 흘려보내기 시작한다.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 했고 쉽게 만들 수 있고 빨리 대처할 수 있도록 ‘토목’화 된 것이다. 소재와 형태에서 지역성의 고려나 미적 완성도보다는 기능이 먼저 고려된다.
그렇다고 모든 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의 역동성에 대한 사람들의 깊은 감성적 호감은 ‘보이는 물‘의 급속한 기술적 발전도 가져왔다. 더 높게 솟구치게 할 수 있었으며 인공적인 힘으로 호수와 같은 잔잔한 경관도 만든다. 다만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투입된다는 단점이 있을 뿐.
지금 우리는...
스테이트타워 남산, 서울시 중구 회현동 2가에 있는 이 오피스빌딩 외부공간의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에 대한 태도를 살폈다. 용적률 등 혜택을 받는 대신 땅의 일부를 대중에게 휴게공간 등으로 제공하는 곳이다. 도시 맥락인 정방형 매스와 유리 파사드 마감의 심플한 건축이고 조경 또한 건축의 형과 어울리는 단정한 공간구조다. 예사롭지 않은 감각의 디테일이 내부를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복잡한 도심환경에서 이런 수준높은 조경공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 물’에 대해 살피기 전에 몇 개의 시설물 디테일을 들여다본다. 너르게 앉기 편한 긴 의자는 기능적일 뿐 아니라 시각적인 경관요소의 역할(디자인적 방향성)이다.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교목 열식과 함께 선적인 느낌의 배치로 통경선을 만들고 있다. 콘크리트와 목재의 단순한 조합이다. 시설물들이 공간으로 스며들게 재료를 선정했고 복잡한 도시환경에 맞서지 않고 자신을 낮추고 있다. 소재와 구법에서 많은 디자인적인 배려를 한 것이다.
해부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이 공존하고 있다. 기능에 맞게 하나는 잘 보이도록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있다. 정해진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보이지 않는 물을 숨기고 있다. 둘 다 한철 장사꾼처럼 여름날에 바쁘다가 겨울엔 할 일이 없다. 저 뚜껑을 열어버리면 보이는 물이 되지 않을까. 저 모서리를 자르고 도로까지 터버리면 보이지 않는 물이 될 수 있을텐데...
‘보이는 물’은 공간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에 있으면서 잔잔하게 주변을 투영하고 있다. 바닥은 검은 자갈돌로 처리해서 주위의 풍경을 투영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물의 깊이가 얕아서 큰 효과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물의 순환이 가능하도록 에너지가 투입되어서 한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물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을 방증하듯 경관을 고려해서 만든 녹지는 견뎌내질 못했다. 보이는 물은 보여야 물이다.
세 개의 ‘보이지 않는 물’을 찾을 수 있다. 보도에 내려 잔잔히 흐르고 녹지에서 흘러내리는 물, 이 물을 강으로 흘려보내는 화강석으로 뚜껑을 만든 U형 측구의 물, 마지막으로 건축의 파사드를 타고 흐르는 물. 이 물들은 늘 볼 수 있는 물이 아니다. 비가 오는 날이어야만 볼 수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보인다. 비 오는 날이면 이들의 역동적인 흐름과 방대한 투영면은 좁은 테두리에 갇혀서 왔다 갔다 하는 ‘보이는 물’의 인공적 수경의 모습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을 다루는데 더 섬세한 디테일과 마음을 여는 정성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바닥에 바로 내리는 빗물보다 건축의 파사드에 흐르는 물이 더 많고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자갈을 깔아서 우수배제의 용도로 활용하고 지피식물도 심었다. 자갈의 상징적 경관 메타포를 보았다. 원래 그들이 있던 곳의 풍경을 상상했다. 물이 흐르던 곳, 그곳을 멀리 떠나왔지만 원래의 기억과 닮은 기능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물을 다루는 디테일도 결국은 엔지니어링의 문제를 넘어서 경관을 바라보는 열린 마음의 태도가 아닐까.
열린 마음으로 보면
#1 종묘 월대 석루조
월대에는 특별한 배수 시설이 없다. 그냥 중앙 부분을 돋우고 사방으로 수구를 설치했다. 경사를 따라서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는 모습이 상상된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물이다. 마음으로 보이는 물이다. 비 오는 날이면 직접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굳이 수고스럽게 가지 않고 저 수구의 모양만 보아도 물이 흐르는 모습이 연상된다. 디테일의 힘이다. 기능을 넘어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상세들이 필요하다. 장식이 아닌.
#2 연경당 앞 석함에 있는 개구리 조각
이미 많은 물이 흐르고 있다. 맑은 날에도. 지금이라도 함을 박차고 밖으로 튀어 오를 태세다. 석함이 물을 담고 있지 않아도 이미 그 안은 연못이다. 보이지 않아도 느끼게 할 수 있는 디테일을 만들 수 있다면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이 갈라지기 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