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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Sep 17. 2023

장애는 질병이 아니다?

앨리슨 케이퍼,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장애는 질병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볼 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그게 어떤 역사와 맥락 위에서 어떤 언행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문장인지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나는 저 문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장애는 질병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장애인에게 치료를 강요하지 말라는 의미이고, 장애의 치료만을 상상하지 말라는 의미이며, 나아가 모든 장애가 치료되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지 말라는 의미다. 이걸 뒤집으면, 질병은 치료될 수 있으며, 치료만으로 상상되어도 괜찮으며, 질병이 치료되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근데, 정말 이게 맞나? 괜찮은 건가?


치료만을 상상하게 하는 시간성(curative time)과 그것에 기반한 인식론적/존재론적 폭력을 비판한 앨리슨 케이퍼는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에서 손상, 질병, 장애 사이의 범주를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들의 경계와 정의가 의미의 경합 안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해석되고 있는 것임을 역설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케이퍼가 제안하는 장애의 정치적/관계적 모델의 핵심이며,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 장애뿐 아니라 질병과 손상도 모두 없어져 있다는 것을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질병. 장애도 마찬가지이지만, 질병을 이야기할수록, 질병을 알게 될수록 '질병'에 대해서 말하기 어려워진다. 너무나 많은 질병이, 너무나 많은 질병 경험이, 너무나 많은 아픈 몸이 있다. 이걸 다 질병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만큼. 감기도 질병이고 크론병도 질병이다. 급성기일 때도 관해기일 때도 크론병은 크론병이다. 유형의 문제로 보나 정도의 문제로 보나 관리 방식의 문제로 보나 완치 가능성으로 보나, 너무나 다른 많은 것들이 '질병'으로 묶여 있다(질병이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점점 더 모르겠다). 


감기에 대해서까지 치료만을 상상하지 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점점 더 질병이란 것이 만성화되고 있으며, '아픈 몸'과 '건강한 몸'이라는 범주조차도 너무나 불분명한 것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당신은 건강한가? 왜? 어떻게? 아니라면 어째서?). 이것은 실제 몸의 상태보다 자기인식에 가까운 언어들이다. 치료되지 않는 질병이 너무 많다. 치료만을 상상할 때 삶이 사라지는 질병이 너무 많다. 질병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고 싶어도 상상할 수 없는 이들이 너무 많다. 


다시, 장애는 질병이 아닌가? 혹은, 질병은 장애가 아닌가? 우리는 장애를 질병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시도를 왜 하는지, 그 과정에서 질병이 어떤 방식으로 전제되고 이때 어떤 삶들이 지워지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낫지 않는 질병은 장애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재활 '치료'나 약물을 복용해야 하는 장애는 질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장애는 왜 질병이어서는 안 되는가? 그때 장애와 질병은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가? 그것은 정말 괜찮은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의 번역 이후 우리는 정말 본격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 이후 얼마나 많은 모델들이 제안되었는데(톰 셰익스피어가 <장애학의 쟁점>에서 제안하는 것도 꽤 섬세한 면이 있다) 언제까지 거기에만 기대어 얘기할 것인가. 케이퍼를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정치적/관계적 모델을 통해 주어진 것으로 다뤄 온 개념들과 범주들에 처음부터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게 케이퍼의 논의가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케이퍼는 경계에 질문함으로써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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