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후학 -비와 당신의 이야기

8장 비의 철학 - 스며든다는 것의 의미

by 유혜성

8장 비의 철학 스며든다는 것의 의미


주방이 좁다, 햇빛이 없다,
수압을 확인하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빗소리 좋은 집 앞에서
우린 괜히
말을 잃었지. _By 유혜성

비를 기다리던 어느 날


감정은 흐르고

관계는 천천히 스며들었고

사랑은 그렇게 젖어들었다.


그날은 아직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먼저 촉촉해져 있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공기 어딘가에

설명하기 어려운 흔들림이 얹혀 있었다.


“오늘 비 오겠다.”


입 밖으로 꺼내기 전부터

가슴 안에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또르르,

첫 빗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내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비를 ‘맞고 지나가는’ 존재라기보다

비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비가 오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스며들고,

누군가에게 스며들고,

과거의 기억에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도

조용히 번져 들어간다.


그날 이후 나는

‘스며든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스며든다는 것은

어떤 감정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굳이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삶 안쪽으로 들어오는 방식이다.

1. 인간관계는 결국 ‘스며듦’이다


사랑은 사건보다 과정에 가깝다


사랑은 흔히

어떤 장면으로 기억된다.

처음 손을 잡았던 날,

처음 고백했던 순간처럼.


하지만 마음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대부분의 사랑은

그렇게 또렷한 장면 하나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던 날들이

조금씩 쌓여 만들어진다.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떠올리게 되고,

그날의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고,

별것 아닌 말투가

며칠 동안 귀에서 맴돈다.


그때는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다만

마음이 어딘가로

천천히 기울고 있다는 것만 느낄 뿐이다.


독일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이해’란 단번에 얻어지는 정답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조금씩 깊어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잘 모르겠고,

두 번째엔 고개를 갸웃하게 되고,

어느 순간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뒤늦게 알게 되는 것.


관계도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 문장 하나가 오래 남고

• 표정 하나가 마음에 걸리고

• 말투 하나가 이상하게 반복해서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사랑이 시작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을 뿐이다.


사랑은

“시작됐다”라고 선언되는 순간보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상태”로

우리를 데려간다.


비가 땅을 적시듯,

겉으로는 느리고 조용하지만

속에서는

이미 충분히 젖어 있는 상태로.

2. 감정은 날씨처럼 오고 가고, 고인다


마음의 철학은 기후에 가깝다


감정은

한 번 생기면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왔다가 사라지고,

잠잠해졌다가

어느 날 다시 돌아온다.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이유 없이 가라앉고,

분명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전 마음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왜 이러지?”라고 묻지만,

사실 감정은

원래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감정이 개인의 성격이나 마음가짐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놓여 있는 환경, 관계, 상황 속에서

계속 영향을 받으며 변화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감정에는

항상 배경이 있다.


같은 말 한마디라도

어떤 날엔 웃어넘기고,

어떤 날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 차이는

감정이 달라서라기보다

그날의 ‘기후’가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날의 마음은 맑고,

어떤 날의 마음은 흐리다.

비가 오는 날엔

그 차이가 유난히 또렷해진다.


비는 세상을 조용하게 만든다.

소리가 낮아지고,

걸음이 느려지고,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안쪽으로 돌아온다.


그때

평소 그냥 흘려보냈던 생각이 떠오르고,

애써 접어두었던 감정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비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보다

감정이 보이게 만든다.


냄새, 소리, 온도 같은 감각을 통해

우리가 미처 이름 붙이지 않았던 마음을

표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엔

괜히 생각이 많아진다.


그건 감정이 커져서라기보다

감정이 드러나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가려져 있던 마음이

잠시 비를 맞고

윤곽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3. 스며든다는 것 - 침묵의 관계 방식


관계는 채워지기보다, 젖어든다


사람은 종종

감정이 스며드는 일을 두려워한다.

스며든다는 건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을 열지 않아도 들어오고,

준비하지 않아도

마음을 건드린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한 신호를 기다린다.

말로 확인하고,

이름을 붙이고,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깊은 관계는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어느 날부터

그 사람의 말투가

괜히 귀에 남고,

특별한 이야기가 없어도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해진다.


메시지를 보내지 않아도

하루가 흘러가고,

오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데,

와 있으면

괜히 마음이 놓인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큰 사건이 없어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이미

마음 안쪽에 들어와 있다.


스며든 관계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티도 나지 않고,

속도도 느리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사람이 없는 하루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공기가 달라진다.


그제야

알게 된다.


아,

이미 마음이 젖어 있었구나.


그런 관계는

소리 없이

삶의 결을 바꾼다.


비처럼.

4. 비는 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보게 하는가


비는 외부의 날씨이면서, 내부의 날씨다


비가 오면

세상의 윤곽은 조금 흐려진다.

멀리 보이던 것들은 희미해지고,

가까운 것들만 또렷해진다.


그래서인지

비 오는 날엔

바깥보다

자기 안쪽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창밖을 보다가

문득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괜히 발걸음이 느려진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사실은

몸과 감각을 통해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비도 그렇다.


비를 ‘본다’고 하지만

우리는 사실

젖은 공기 속에 서 있고,

축축해진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그 안에 스며들고 있다.


그래서 비를 바라본다는 건

하늘만 올려다보는 일이 아니다.

그 하늘 아래 서 있는

나 자신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는 일에 가깝다.


비 오는 날이면

괜히 잊었던 마음이 떠오르고,

잘 정리해 두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조용히 올라온다.


오래된 이름 하나가

아무 이유 없이 또렷해지고,

그 이름을 떠올리는

내 마음의 온도까지

함께 느껴진다.


비는

새로운 감정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이미 안에 있던 감정이

보이도록 만든다.


그래서 비는

내면의 리듬을 깨우는

아주 조용한 신호다.


5. 스며듦의 철학 - 사랑이 오래가는 이유


사랑은 크게 남지 않고, 오래 남는다


사람들이

비 오는 날의 사랑을

유난히 오래 기억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날의 감정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의 사랑은

대단한 일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마음이 머무를 자리를

조금 더 넓혀 놓는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대화는 흐릿해지는데,

그날의 공기와

그날의 온기는

이상하리만큼 또렷하다.


사랑이 오래가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감정이 크고 격해서가 아니라,

조용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장면은 없었지만

마음의 습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급하게 쏟아진 감정은

쉽게 마른다.

표현은 많았지만

머무르지는 못한다.


반면

한 방울씩 스며든 감정은

어느새

관계의 바닥을 적시고,

그 위에서

서로가 미끄러지지 않게 만든다.


사랑은

폭우의 강도보다

적셔온 시간의 길이로 남는다.


그래서 오래가는 사랑은

늘 조용하다.

이미

많이 젖어 있기 때문이다.

6. 스며든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


감정에 젖을 수 있다는 것


비가 스며드는 날,

사람은 조금 더 살아 있다.


스며든다는 것은

관계에 반응한다는 뜻이고,

감정에 반응한다는 뜻이며,

세계와 다시 연결되고 있다는 신호다.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흔들리고,

별것 아닌데

생각이 오래 남는 날들.


그런 날들은

감정이 약해진 게 아니라,

아직 감각이 닫히지 않았다는 증거에 가깝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스며들고 싶지 않아.”


이 말은

아직 아물지 않은 마음을

조심히 감싸 쥐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다시 다치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만큼만

세상과 거리를 두겠다는

조용한 자세.


하지만

스며들 수 있다는 건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어떤 날씨에

기분이 달라지고,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가 떠오른다는 건


아직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스며듦은

약해지는 일이 아니라,

다시 살아 보겠다는 선택이다.


그리고 비는

그 선택을

가장 조용하게,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비는 멈춰도

스며든 마음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각주 및 참고문헌

1.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이기상 옮김, 문예출판사, 2006.

해석학의 대표 저작으로, 이해를 단발적 인식이 아닌 역사적·시간적 과정으로 설명함.

2.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김정아 옮김, 돌베개, 2010.

감정이 개인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적 맥락 속에서 형성·유통됨을 분석한 저작.

3.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주성호 옮김, 세창출판사, 2025.

몸과 감각을 중심으로 세계 경험을 사유한 현상학의 핵심 저작.


임현정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