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완벽한 날들을 살고 있나요?
개봉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봤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안 봤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인천에서는 유일하게 CGV 한 곳 아트관에서 그것도 아침 조조 한 편만 상영하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읽다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내 마음에는 둘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를 느낀 것 같다. 바로 다음날 표를 예매했다. 이 영화를 먼저 보고온 큰아들은 집중해서 보기 힘들었다고, 컨디션이 좋을 때 봐야하는 영화라고 했다. 평론가들의 좋은 평가가 영화 매니아 아들을 영화관으로 이끌었겠지만 20대 청년이 완전히 공감하기는 무리이지 않았나 싶다.
도쿄 공공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배우 야쿠쇼 코지는 56년 생)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낸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한 집이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그의 방이 인상적이다. 벽에 걸린 거라고는 그의 작업복과 옷 한 벌 정도, 방 한쪽엔 1인용 침구가 놓여있다. 그의 취향을 볼 수 있는 건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와 커다란 플레이어, 그리고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들(주로 문고판 작은 책들이 많다)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무심하게 침구를 정리하고 큰 창을 통해 보이는 나뭇잎의 흔들림과 하늘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분무기로 책상 위에 진열된 은행잎 화분에 물을 주고, 밥은 해먹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씽크대에서 양치질을 한다.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문앞에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 소지품을 하나하나 주머니에 넣는다. 핸드폰, 지갑, 카메라, 열쇠, 손목시계(이건 쉬는 날에만 착용하는 것 같다), 그리고 동전. 현관문을 나서면 그는 예외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짓는다. 오늘도 잘 지내보자고 인사하는 것처럼. 동전의 쓸모는 집앞에 있는 자판기다. 캔 커피 하나를 뽑아서 청소도구가 가득한 차에 탄다. 출발하기 전 몇 개의 카세트 테이프 중에 하나를 골라 음악을 틀고 출근한다.
공원 화장실을 청소하는 그의 표정은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과 닮았다. 평온하다. 화장실을 다녀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는 않지만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그의 일 솜씨는 탁월하다. 우리 집 화장실보다도 더 깔끔하게 구석구석,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함께 일하는 젊은이가 묻는다. 이런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굳이 대답하지 않는 그에게서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충만함이 느껴진다.
퇴근 후 동네 목욕탕에 들렀다가 자전거를 타고 단골 술집에 들른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며 그를 맞이하는 주인장은 주문하지 않아도 그가 평소에 먹던 메뉴와 술 한 잔을 내온다. 조용히 혼자 술잔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와 스탠드 아래에서 문고판 책을 읽는다. 이불 위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그의 모습이 나 같아서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다시 아침, 전날과 똑같은 하루의 시작이다.
아, 휴일에는 좀 다른 루틴이 있기는 하다. 작업복 대신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손목시계를 착용한다.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세탁방에 갔다고 사진관에 들러 필름을 맡기고 헌책방에 들른다. 문고판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책을 고르고, 단골을 맞이하는 책방 여주인은 그가 고른 책에 대해, 작가에 대해 몇 마디 할 뿐이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욕심내서 다 읽지도 못할 분량의 책을 빌려오는 나와 달리 히라야마는 딱 한 권의 책을 손에 주고 나온다. 그의 간소한 생활, 소박한 삶의 태도, 물 흐르듯 일상을 살아가는 면이 『월든』의 소로우를 닮았다. 히라야마가 가는 또 하나의 술집도 인상적이다. 여사장의 노래 솜씨 또한 기억에 남는다. 사람과 사람이 통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는 데에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쌓이면서 그냥 느껴질 뿐이다.
그의 일상에 유일한 변화는 여고생으로 보이는 조카의 방문이었다.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던 그가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조카였다. 조카는 외삼촌의 생활 방식을 존중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삼촌을 따라가 청소를 돕기도 하고 공원에서 함께 점심을 먹다가 필름 카메라로 하늘과 나무를 찍는다. 목욕탕에 갔다가 자전거를 타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중에 조카를 데리러 온 여동생은 히라야마와 결이 아주 달랐다. 무슨 사연인지 가족과 거리를 두고 사는 그는 조카와 여동생이 가고난 자리에서 처음으로 긴 울음을 토해낸다. 가족이어도, 함께 자란 형제여도 인간의 고독은 온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그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존중이지 않을까 싶다.
조카가 가고 다시 돌아온 일상. 때로는 다른 날보다 힘든 날이 있고, 뜻하지 않은 이별을 경험하기도 하고, 유독 외로움에 몸서리쳐지는 날도 있겠지만 히라야마의 말처럼 '지금은 지금이고 다음은 다음'이다. 다음은 알 수 없으니 지금을 살아내는 수밖에.
별거 없는 히라야마의 완벽한 날들에게서 큰 위안과 용기를 얻는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가면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퍼펙트 데이일 수 있다. 사람들의 편견, 사회의 기준 따위는 쓸데없다. 나의 지금을 살아내는 건 오직 나뿐이다. 내 취향의 영화 한 편, 좋은 책 한 권, 내 적성에 맞는 일,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집, 건강한 두 아들, 남편과 나누는 술 한 잔... 내 하루를 채우는, 좋은 것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면서 '완벽한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들어가는 나의 충만한 하루에 대해 나도 할 얘기가 좀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평소처럼 출근하는 히라야마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차안에서 묘한 표정을 짓는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것 같더리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험난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온, 나이 지긋한 한 사람의 인생이 그 표정 속에 담겨있다. 오늘도 내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하루를 맞이하는 그의 마음과 태도가 지금과 같다면 그의 인생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희망적이고 아름다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함께 흐르는 음악 <Feeling Good>은 그야말로 굿이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퍼펙트 데이즈>의 OST를 찾아들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던 노래도 있고, 처음 듣지만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도 있다. 아무튼 좋다. 오늘 아침에는 이 음악을 틀어놓고 요가 명상을 했다. 영화의 여러 장면들이 재생되었다. 느린 영타를 치며 노래 제목과 뮤지션 이름까지 적어봤다. 기억하고 싶어서.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UkUjMUNJyCweMs9zWd-58wdH0nHRMAvj&si=P4QLs_DMzbN7zEoB
Perfect Day - Lou Reed
Pale Blue Eyes - The Valvet Underground
Brown Eyed Girl - Van Morrison
Feeling Good - Nina Simone
The House of the Rising Sun - The Animals
Sunny Afternoon - The Kinks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 Otis Redding
Redondo Beach - Patti Smith
[Walkin' Thru The] Sleepy City - The Rolling Stones
Perfect Day - 이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