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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재 Jun 12. 2024

바이스,를 마치며

인정욕구로 점철된 내 과거에게

언론계에는 요상한 말과 호칭들이 많다. 야마, 마와리 같은 일상적 은어1진, 2진 등 선후배의 순번을 가리키는 말들이 대표적이다. 캡·바이스도 요상한 호칭 중 하나다. 팀장·부팀장이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굳이 사건팀에 한정해서 팀장을 캡이라고, 부팀장을 바이스(Vice)라고 부른다. 이전까지 그냥 선배라고 불리던 사람이 어느 날 인사발령으로 경찰청을 출입하게 되면 후배들은 그를 한날한시에 입을 모아 ‘바이스’ 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호칭이 달라지는 것이다.


호칭에는 힘이 있다. 사람 간의 권력 관계를 재편하는 힘이 있다. 특히 커리어를 사회부 사건팀에서부터 시작하는 종합지·방송사 기자들에게 그 힘은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초년병시절 맞닥뜨리는 선배들 중 유이하게 호칭이 다른 사람이 바이스와 캡이기 때문이다. 새내기였던 나는 두 호칭을 가진 사람이 뭔가 보통 선배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수습시절 본 그들의 아우라, 포스. 어린 나는 어렴풋이 그 자리 자체를 동경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바이스를 달았던 건 2019년 8월이었다. 내 입사 연월이 2016년 7월이다. 고작 만 3년 1개월차에 바이스를 단 건데,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다. 당시 바이스를 하던 선배가 이직하면서 얼결에 바로 밑에 있던 내가 맡게됐던 것이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바이스 대행’이었던 셈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타사 바이스들과 비교했을 때 연차도 낮고 어리바리한 ‘미숙한 바이스’였다. 타사 선배들도 날 그렇게 봤다. 그런데 그런 편견 어린 시선들이 내 승부욕을 자극했던 것 같다. 타사 선배들은 물론 회사 안에 머무는 사람들까지 모두 보란듯이 잘 해내고 싶었다. 뭘 아는 척, 뒤지지 않는 척 열심히 머리를 굴렸고 나름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며 다녔다. 뒤돌아보면 좀 안쓰러운 시절이었다.


나름 발버둥쳤지만 당시 사회부장은 입장이 달랐다. 부장은 저연차였던 나를 불안해했다. 바이스 대행을 맡은 지 한 2~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부장은 나를 앞에 두고는 "00이가 육아휴직에서 복귀하면 걔를 바이스로 앉혀야겠어"라고 했다. 부장은 그 말이 내게 딱히 상처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넌 잠시 대행하는 거잖아’.. 부장이 실제로 이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꼭 그렇게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달 여, 내가 정식 바이스인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마땅한 대체자가 없어 바이스이기는 한, 아주 염병할 상황이 대책 없이 흘러갔다. 하루는 마음을 다잡고 부장을 찾아갔다. "부장, 저 바이스 못 시키겠으면 그냥 내보내주세요. 그게 아니면 믿어주세요. 하루를 출입하더라도 회사가 절 믿어주셔야죠.." 흥분한 탓에 이렇게 논리정연하게 말한 것 같지는 않지만, 요지는 잘 전달했던 것 같다. 당시 부장 반응이 웃겼다. 내 말을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바이스가 뭐 좋은 자리라고 그러냐~" 하며 넘어갔다.  매사가 얼렁뚱땅인, 아주 비겁한 사람이었다. 당시 캡은 나름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후배를 위해 발벗고 나서주는 사람까진 아녔다. 캡도 "바이스면 바이스인거지 왜 그래.."라고 했다. 참 어렵게 지켜낸 ‘바이스 대행’자리였다. 하지만 다음 정기 인사철이 오고 난 바로 교체됐다. 짧고도 긴 8개월이었다. 


두 번째 바이스는 2022년 5월에 하게 됐다. 당시 새로운 캡이 "경력자가 하면 좋겠는데"라며 같이 일하자고 제의했다. 별로 고민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뻤던 것 같다. ‘이제 좀 제대로 해볼 수 있겠구나..’싶었다. 두 번째였기 때문에 성과도 잘 뽑아냈던 것 같다. 2019년에 만났던 경찰들은 그새 계급이 한 두 개씩 올라가 있었고 나를 반가워했다. 경찰국 논란, 김혜경 수사, 이태원 참사 등 굵직한 사건들이 지나갔다. 나는 윤석열 정부의 첫 행안부 장관이 경찰사(史) 처음으로 경찰청장 후보자들을 일대일로 불러 면접했다고, 경찰이 김혜경 법카 의혹으로 129곳을 압수수색 했다고, 또 서울청장은 이태원 참사 예견 보고를 받고도 집에 있었다고 기사를 썼다. 2023년 1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바빠서 거절하기를 눌렀더니 이번엔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일보 사회부장인데요..’ 2023년 2월, ##일보로 이직했다. 처음보다는 살짝 긴 10개월 간의 바이스 생활이었다.


세 번째 바이스는 ##일보에서 2023년 7월에 하게 됐다. ##일보 입장에서는 나를 사회부 자원이랍시고 데려왔기 때문에 이렇게 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나를 스카웃한 부장은 경력자로서 뭔가를 보여주기를 원했다. 부장은 실제로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제 뭘 보여주셔야해요’ 라고 카톡을 보냈다. 살면서 이렇게 쪼여본 적이 있나 싶었다. 그래도 경찰청 출입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이제는, 내가 최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판에서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하고 어려운 상황이 오면 내 실력을 보여줄 몇 번의 기회는 만들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근자감은 지난 두 번의 바이스 생활을 그래도 대충하지는 않았다는 어떤 위안감에서 비롯됐다. 오송 홍수 참사, 신림역·서현역 흉기난동, 이재명 피습, 이선균 자살 ..어지러운 시간들이 지나갔다. 대가는 있었다. 50명이 넘는 부서원 중 나름 손가락에 드는 평가를 받았다. 12개월이 지났다.




이번 인사에서 탈 사건팀을 1지망으로 썼다. 높은 확률로 나가게 될 것 같다. 남은 커리어를 생각하면 이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합쳐서 30개월, 징한 시간이었다.


바이스란 호칭을 보면 참 요상한 기분이 든다. 한때는 내가 동경했던 직책이었고, 있으면서 인정받고 싶은 자리였고 증명해야 하는 자리였다. 인정욕구로 점철돼 참 고되게도 살았던 2년6개월의 세월이 ‘바이스’란 세 글자에 압축돼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 '바이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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