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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Sep 10. 2023

적당한 가난

 적당히 가난하다. 빈곤하다 하긴 뭐하고.

수급자는 아니다. 밥은 굶지 않는다.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는다. 끼니는 굶지 않으나 계란이나 고기 종류는 자주 구경하지 못한다. 가계는 부친 1명의 생산활동으로 어찌어찌 유지가 되나, 매년 재계약이 될지 않을지 노심초사해야하며, 많은 돈이 아니다. 관리비가 항상 두어 달 연체되어있고 에어컨을 돈을 아낀다고 1년에 세 번쯤 트는 집이다. 


고등학교 직전까지는 대한민국 경제관에 대충 '서민'의 위치에 있었던 것 같고, 그 이후엔 부친의 사업, 사기, 몰락, 알콜중독, 그에 따라 잦은 문제와 뒤따른 이직, 점점 낮아지던 연봉, 결국은 그 업계에서 퇴출당하며 우리 집은 적당한 가난의 길에 들어섰다.


내 현재 상황은 이렇다. 개인 빚 450여만원. 생산활동 전무. 10년째 우울증. 2년 째 약물치료 중. 통장잔고 7000원, 지갑에 5000원 현금. 핸드폰비 연체. 버스비 1250원이 아까워 나가지 않는다. 엊그제는 병원에 다녀왔는데, 하도 오랜만에 나간 탓에 환승을 까먹어 1250원이 더 찍혔다.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은둔형 외톨이에 접어들고 있는 생활. 가끔 나를 집 밖으로 꺼내 먹을걸 사 먹이는 마음 따뜻한 지인들이 있으나, 통장잔고를 채워 달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취업 실패. 알바, 나이/체격 등의 조건으로 인해 모두 무산. 만만하다 생각한 중소기업조차 사람을 뽑지 않는다는 상황에 당황했다.


어제는 한 무용수의 크루에 모집 참여 신청을 했다. 구질구질하지만 결국 돈이 없다는 얘기를 했고, 친구와 인천에서 살 계획이 있는데 나를 받아 줄 수 있는지, 깔끔하지 못한 마음을 깔끔하게 쓰려 해 봐야 구구절절했고 지역이 달라서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3월에 서울에서 쫒겨나고 또 도망치며 생각했다. 내가 서울에 살 능력이 되었더라면. 부모 탓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상승하진 못하더라도 가정이라는 배가 침몰하지 않게 부단히(정확히는 모친께서) 노력했고, 술에 쩔어 있는 자가 방향타를 잡기는 했으나 어쨌든 가라앉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적당한 가난 아래 아직도 허황된 서울의 꿈을 꾼다. 기회보다 절망이 더 많을 동네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적은 기회조차 내가 사는 동네엔 없다. SNS에는 서울에 사는 게 당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친다. 서울에 못 산다고 실패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다. 아직 놓지 못한 무용에 대한 갈망은 서울이 아니면 아무래도 이루기도 어려우며, 기껏 찾아낸들 가격도 더욱 비싼데 질도 떨어진다.(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가 직접 찾아가본 몇몇 군데에서는 그랬다) 


적당한 가난은 꿈을 좀먹는다. 그냥 사람을 갉아먹는다. 어릴 적, 그리고 지금도 가끔 친구 집에 가면 놀란다. 과자나 라면 등이 들어찬 찬장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모친께서는 라면 스프를 대용량으로 사고 따로 면 사리가 300원인데 이걸 사서 먹자는 이야기를 오늘 꺼냈다. 그러려면 그러시라고 했다. 어차피 경제적으로 독립도 못 한 채 집에서 쌀이나 축내는 내가 뭔 얘기를 하겠냐만.


적당한 가난과 우울 그리고 무기력은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들고, 내가 갖지 못한 걸 자각하지 못한 채 누리고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게 한다. 부모를 잘 만나 'ㅇㅇ'에 산다던 사람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는 항상 인생이 힘겹다 했으나, 그건 자기가 일도 하고 무용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하니 피곤하다, 정도의 이야기였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 역시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타고나길 많은 돈을 가진 탓에 그에겐 시간 역시 충분했고, 무용단에 상주하며 수많은 것들을 익힌 것을 봤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게 은근히 시비를 걸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비추며 나를 몰아가 결국 고시원에서 살던 나를, 무용단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여전히 잘 산다. 가끔 무용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의 SNS에 올라오는 그는, 차단을 헀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돈이 많으면, 마음도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내게 싸가지 없다고 말하기보다 그냥 내버려두지.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지 말고 자기 일이나 하지. 따로 불러내놓고 때리려 하지 말지. 그걸 밖에서 얼핏 들은 무용수는 '싸우지 마' 라고 했는데, 그는 뭘 싸움이에요, 하고 웃어넘겼다. 나만 속이 타들어갔다. 결국 나만 쫒겨났지만.


나는 아직도 고시원 방에서 900원짜리 육개장을 힘든 날 데워 먹던 걸 기억한다. 그것도 기분이 심하게 울적한 날에 특식으로 먹은 거였고, 보통은 고시원비에 포함된 라면과 오래된 쌀로 지은 밥만 먹었다. 작은 볶음김치를 두 끼 세끼에 나눠 먹었다. 코로나에 걸린 채 200원이라도 쌀까 싶어 편의점 대신 마트를 검색해 갔다. 100미터마다 골목에 토하고 기대고 거의 쓰러져가면서. 그리고 그렇게 앓다가 '일단 나가' ,'해외 다녀와서 얘기하죠' 라는 말을 들었고 그 이후 그들은 답장이 몇 달간 없었다. 


적당한 가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시도를 더 해볼 수 있었을까? 조금 더 풍요로웠다면 삶이 극적이진 않아도 이렇게 바닥에 금이 간 얼음 위에 있는 것같지 않았을까. 어릴 적 일찍 죽은 사촌이 생각난다. 얼음이 언 시골 개천에 놀러갔고, 얼음이 깨져 발이 빠졌다. 다행히 어린 나이에도 정강이 정도 물이라 좀 춥고 말았던 걸 기억하지만, 이제 내가 선 얼음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저수지 같다. 까딱하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무겁고 차갑고 어둑한, 그런. 


적당한 가난에 대한 얘기가 길었다. 옆으로 샜다. 어쩌겠는가. 내가 쓸 수 있는 능력은 이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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