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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Jun 18. 2024

고장난 친구를 대하기

바뀌어버린 사이에 대해 

박이 고장나 버렸다. 박은 13년 된 친구로, 팔 하나는 내게 떼어주겠다 편지를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걸 허튼 말로 여기지 않는다. 그가 일일이 헤아리지는 않았으나, 내게 대가 없이 베푼 금액만 거의 천 만원에 달한다. 지금이라고 부유하진 않으나, 통신비도 몇 달씩 밀리고 700~900원 하는 삼각김밥을 사먹는 것도 고민하던 시절 그는 나를 불러다 밥과 술을 샀다. 내 우울이 극을 달리던 시절 해외에 일을 나간 박은 내게 심리상담 비용을 지원했다. 300만원. 돈만으로만 헤아릴 수는 없겠으나, 그가 내게 마음을 대가 없이, 아낌없이 쓴 것은 사실이다. 


그랬던 박이 고장이 났다. 그는 내내 열심히 살았다. 자신의 기준이 확고했다. 그런데 세상이 소위 말하는 '억까'를 시전했다.(억지로 깐다는 말이다) 그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인해 1시간 가량 소총 앞에 무릎꿇고 있어야 했고, 기지를 발휘해 겨우 살아 돌아왔다. 나는 그 때 5분인가 연결된 인터넷을 통해 받은 국제전화 번호로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해 박이 살아있는지 확인했다. 


대학병원의 흉부외과 수술실 간호사로 3년을 일한(종종 만나는 간호사 지인들은 대체 그 병원에서, 흉부외과에서 어떻게 3년이나 버티냐고 혀를 찼다) 박은 대학원에 갔다. 그리고 수단에 갔다. 그리고 다행히도 몸 성히 돌아왔다. 연구원 쪽 일을 알아보겠다 했다. 정권교체 이후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지원하려던 직종의 TO가 줄었다. 수단에 다녀온 이후 그는 애인의 집에 얹혀 산다. 그의 애인은 똑부러지고 자기 일을 잘 한다. 다만 박에게만큼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유아퇴행을 한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너무나 간단한 일도 다 박이 해주기를 바란다고. 마실 물을 뜨고, 싱크대의 개수대에 낀 음식물을 치우는 그런 일. 박은 미쳐버릴 것 같다고 한다.  


박은 수단에 다녀온 이후 충분한 정신과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가 자던 방에 들어갈 일이 있었다. 미리 예고를 해둔 상황이었다. 발소리와 문소리를 들은 그는 기겁하듯 숨을 들이마쉬며 깼다. 그는 수면제를 먹는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못 잔다. 하루 운동을 3시간 가까이 한다. 헬스를 1시간 반, 수영을 한시간 넘게.  그걸 매일. 그래도 잠을 못 잔다고 한다. 전에 뼈가 부러졌을 때 통증으로 처방받은 졸피뎀(스틸녹스)가 있냐고 묻는 그를 보며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내가 그 약에 의존하는 증세가 보이자 그는 그 약을 그만 먹길 권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13년을 만난 친구지만 도대체 쉬는 걸 본 적이 없다. 대학 시절엔 카페 매니저를 하며 과에서 상위권을 항상 다퉜고, 더 나은 곳, 더 나은 자신을 항상 원했고 노력했다. 나는 그가 항상 더 높은 곳을 원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젠 정신이 지쳐 버리고 망가져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수면제의 영향인지, 주위 환경의 영향의 누적 때문인지 말이 어눌해졌고, 기억력이 떨어졌다. 말이 날카로워졌다. 만난 지 처음으로 술 사달란 얘기를 하길래 일을 마치자마자 서울을 가서 술을 샀다. 얘기를 좀 들어주고, 집에 돌아왔다가 최근 다시 서울에 방문해 그에게 내 기준엔 꽤 비싼 식사를 대접했다. 그는 내내 투덜거렸다. 식사 이후에 공연에서는 혹평을 했다. 이해한다. 그의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식사의 질과 공연에 대한 발언 모두. 그래도 내가 나름 고심해서 기분 내주려고 했는데. 섭섭했다. 하지만 박은 자신의 기준이 옳다 믿는 사람이므로, 내 말은 잘 안 듣는다. 


작년엔 크게 싸웠다. 내가 그에게 얻어먹은 수많은 밥과 술, 여행 등으로 나는 마음 한켠에 나는 약자이며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위아래가 생긴 것 같았다.분명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맞았지만, 위에서 내리찍는 듯한 말은 견디기 힘들어 결국 한번 대차게 싸웠다. 나는 옳고 네 방식은 틀렸어. 이런 대화. 싸운 후엔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한 두달 후, 그의 대학원 졸업에 그는 내게 ktx 표를 보내 초대함으로서 풀었지만.


박은 쉴 곳이 없다. 그가 지내는 곳은 스트레스그 자체다. 그의 애인이 그에겐 스트레스이다. 본가로 돌아가는 건 상상도 못 한다. 수단에서 살아 돌아온 후, 당시 근처에 머물던 내게 연락이 왔다. 그가 수단에서 인천을 거쳐 본가에 간 지 겨우 6시간만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다 못해 나온 것이다. 그날 낡아빠진 건물의 계단에 주저앉아 맥주를 마셨다. 박의 모친께서는 억척같고 괄괄한 분으로, 그 생활력으로 박을 포함한 세 남매를 키워내셨다. 하지만 그만큼 여유가 없어 마음이 성마른 분이기도 하다. 박은 본가에도 방이 없고, 지금 있는 곳도  있을 곳이 없다. 그가 지내는 곳이 스트레스 그 자체인 공간인 것이다.


장황하게 얘기를 썼는데, 나는 박을 견딜 수가 없어졌다.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봤던 공연을 혹평한 후(이건 뭐 괜찮다. 조금 아쉽긴 해도.) 차라리 다음엔 LG아트센터의 공연을 보러 가자 했다. 내가 곧 오를 공연이 LG아트센터에서 제작한 공연이라고 했다. 거기서도 1/5는 지뢰긴 해. 라고 대꾸했다. 순간 열이 뻗쳤다. 나는 참는 걸 잘 못하니까, 내가 참고 참는대도 티가 많이 났을 거다. 야, 너는 지금 수면제가 아니라 상담이랑 스트레스에서 멀어지는 게 필요하다니까? 먹어도 상황 모면하는 지금 약 말고, 그냥 필요한 약을 제대로 많이 먹어, 라고 말하는 내게 박은 그러다 나중에 늙어 황달 오고 복수 차서 걷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똥 지리다 죽는다?ㅋㅋㅋ 라고 했다. 화내지 않았다. 그는 내가 화를 내지 않음에 신기해했다. 


그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연습을 나가며 그에게 병원을 잘 가고, 잠을 잘 자라고 톡을 보냈다. 내가 널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줄 의향이 있다 했다. 통장에 겨우 150만원밖에 없으되, 나는 그의 정서를 위해서라면, 그가 혼자든 내가 같이 살든 둘이 단기로 살며 쉬어갈 단기매물 정도는 알아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는 거절했다. 


그는 나의 우울을 10년 감내했다. 나의 인내가 너무 모자란 건지 알 수 없다. 나는ADHD약을 복용한 이후부터 조금 덜 멍청해졌고, 그는 둔해졌고 어눌해졌으니, 이제는 내가 이 친구를 더 참아넘겨줘야 하는 때가 된 것 같은데, 실상이 쉽지가 않다. 빚을 갚는 느낌으로 만남을 가지거나 연락을 하니 죄책감과 피로가 든다.


사람은 어떻게 해도 변할 의지를 스스로 가지지 않는 이상 도울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도 그걸 알고 경제적으로 모자란 내게 상담을 권했을 것이다. 난 덕분에 조금 덜 우울해졌고, 여러 일들을 조금씩 스스로 해나가기 시작했다. 공연에 작은 역할로라도 오르고, 짧은 알바라도 해보고. 하지만 그는 너무 견고하고 동시에 완고하다. 견고하면서 총명했던 그가 총기를 잃으니 나로서는 대책없는 나르시스트를 보는 느낌이다. 에세이를 쓰는 나를 폄하하기도 해도 그냥 다른 사람의 시야는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내가 하는 공연을 탐탁지 않게 여겨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점점 내가 견디기 무거운 관계가 되고 있다. 끊어내고 싶지는 않다.


허나 박이 스스로 괜찮아질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 나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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