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여자이고 아들은 남자
아이 셋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지난 10년 동안 익숙해졌을 뿐이다.
'다 크고 나니 아이가 셋이서 참 좋다'라고 쓴 어느 지인의 글 속 구절에 위로를 받았다.
게다가 그 아이 셋이 모두 아들이어서, 그래서 더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큰 아이가 십 대에 접어들면서 '아~ 이래서 아들 키우기 힘들다는 거였구나'를 실감하는 중이다.
세 아이중 막내는 역시 막내답다.
이마에 川가 보이면 얼굴을 들이밀고는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그 주름을 쭉쭉 펴준다.
"엄마~ 이걸 이렇게 펴줘야 기분이 가 좋아져요"
웃음이 났고, 관찰력 좋은 녀석의 행동이 마냥 귀엽다.
딱히 화가 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내 이마에는 늘 川가 새겨져 있는가 보다.
밤마다 입맞춤을 해야 잠이 들고, TV를 보더라도 엄마품에 안겨서 보고, 새벽마다 내 침대로 다가와 어느새 내 가슴팍에 파고드는 9살짜리 남자아이.
학교에서 만들어 온 엄마 선물이라며 가져와 책상에 예쁜 쓰레기들을 모아 놓는 둘째 녀석
눈썰매를 끌어달라는 동생의 성화에 엄마 힘들어서 안된다며 두 개의 썰매를 끄는 이미 어른이 된 중학생 아들
하지만 아무리 내 품 안에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마음 깊숙이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아들은 성장할 것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또 누군가를 집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아들은 떠나야 하는 존재이다.
생애 전반기에 아들은 엄마와의 친밀감을 쌓으면서 아들은 미래에 사귈 이성과의 친밀감을 선행 학습하게 도고, 아들은 세상의 여자를 엄마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고 한다. 여자의 사랑이 무엇인지 안내하는 엄마의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 같다.
엄마는 아들과 밀당 중이다.
감정을 공감받고 고유하기 위해 아들과 대화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엄마는 아들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아들과 엄마 사이에 엄마만 느끼는 거리감이 늘 존재한다. 하지만 아들은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아들은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는 엄마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딸인 나도 어린 시절, 엄마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말하기보다는 더 많이 들어주고 싸움으로 발전되지 않으려면 돌발적인 언행을 지적하지 말아야 한다. 무관심하라는 예기는 아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니 아들의 문제가 걱정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를 도울 수가 있었다.
아들에 대한 애정표현이 나이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
어릴 적에는 거리낌 없이 안아주고 뽀뽀해주던 녀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들의 육체적인 성숙이 엄마와 아들의 마음의 거리에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성장을 불편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엄마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아들의 신체 변화를 편안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십 대의 아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만한 수준의 애정표현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은근슬쩍 아이의 팔짱을 끼고 걷는 것. 어색해하는 듯 하지만 거부하지는 않는다. ㅋ ㅋ ㅋ
그리고
너의 반항은 학교생활, 친구관계, 학업, 훈련 등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엄마에게서 감정적인 후퇴를 하는 거라 생각할게.. 너의 반항에 엄격하게 반응하기보다 애정을 달리 표현하는 거라 생각할게..
여자들은 유대감을 언어로 다지지만 남자들은 행동으로 함께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실행에 옮겼다.
자전거를 함께 타거나, 산책을 하는 일... 이것도 유대감을 다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코로나가 선물했던 몇 안 되는 좋은 시간 중의 하나였다.
무언가를 함께하는 것은 애정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이다.
아들은 결국 엄마에게 돌아온다
아들은 성장하면 엄마 곁을 떠나게 되어 있다.
성장에 맞추어 아들을 놓아주어야 하는 막연한 그날을 생각하며 매 순간 나에게 더 집중하기 위한 선택을 할 거다. ( 아들만 셋이라 )
유년기에 시련과 방황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아들을 보며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끈을 절대 놓지 않아야 한다. 관계가 멀어졌다고 해서 이를 개선하는데 너무 늦은 법은 없다.
2020년 게임머니 사건으로 아들과 나는 한 번의 시련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아이와 나의 유대감을 확인했다.
이 아이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 제일 무서웠고, 관계가 멀어질까 두려웠다.
아들은 언젠가 집을 떠나는 존재다. 하지만 잠시 멀어진 거리를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으로 채우다 보면, 엄마를 도울 수 있는 남자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믿어주고, 참아내고, 사랑하면 성인이 되어 다시 엄마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엄마는 더 이상 아들의 첫사랑이 아니다.
아들 공부하며 엄마가 성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