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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눌리에 Jun 02. 2021

#10. Holiday는 끝, working을 시작한다

프랑스 덕후의 프랑스 살이 이야기

 ‘워킹홀리데이’를 왔으니 일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구직을 시작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학생 도시고 실업률이 워낙 높아서 일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도시로 눈을 돌렸다. 니스에 있는 호스텔과 엑상 프로방스에 있는 현대미술관에 지원했는데 미술관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프랑스어 인터뷰는 처음이라 정말 긴장되었다. 수업 쉬는 시간에 인터뷰를 하게 되어 어학원 구석에서 스카이프를 켰다. 인터뷰는 프랑스어로 5분, 영어로 5분 정도로 간단하게 진행되었고 2주 뒤에 연락 주겠다며 그동안 다른 일을 찾지 말고 기다려주면 좋겠다는 말로 끝났다.    


 엄청난 여지(?)를 남긴 인터뷰라서 가만히 기다렸는데 3주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해서 혹시 까먹은 건가 싶어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미안하다고 잊고 있었다’는 답장이 왔다. 한국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닌 것 같긴 했다. 그러더니 ‘5월 31일부터 일할 수 있냐’는 메시지가 왔다.


드디어 나도 프랑스에서 일을 한다!


엑상 프로방스는 ‘도시 위시리스트’에 있던 도시였다. 내가 일할 현대 미술관은 ‘미라보’라는 이름을 가진, 엑상 프로방스의 가장 중심 거리 옆에 위치해 있었고 건너편에는 영화관이, 옆 골목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 있었다. 미술관에는 조약돌이 깔린 넓은 정원이 있었는데 연녹색 나뭇잎들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예뻤다. 정원 한쪽에서는 현대 미술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 건물은 예전에는 귀족 가문이 살던 성으로 일 층이 미술관, 정원은 레스토랑이었다.

원래 내 포지션은 미술관 티켓을 발권하는 것이었는데 도착한 첫날 레스토랑의 새로운 메뉴를 테스트한다고 해서 일일 키친 스테프를 했다. 셰프는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나를 키친 스태프로 쓰고 싶어 했고 사장인 니콜라가 하루 정도 테스트로 일해보는 것을 제안했다(프랑스는 일을 구할 때 하루 이틀 정도 테스트 근무를 하고 채용을 결정하는 것 같았다). 사실 티켓 발권 업무가 훨씬 쉽고 편할 것 같았지만 나는 나의 호기심에 손을 들어주었다. 셰프인 에르베는 파리 출신으로 여름에는 이 레스토랑에서 근무하고 겨울에는 브라질에 있는 대학교에서 프랑스 요리를 가르친다고 했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애피타이저로는 세 종류의 샐러드와 참치 가르파초가 있었고 디저트로는 두 종류의 아이스크림과 케이크가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와 셰프 둘 뿐이라서 일이 정말 많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복숭아 껍질을 까고 샐러드 채소를 씻고 애호박과 가지를 썰었다. 샐러드드레싱을 만들고 복숭아 절임용 시럽을 만들었다. 샐러드와 함께 제공되는 브레드 칩도 만들었는데 매일 빵을 썰고 올리브유와 로즈마리를 뿌려 오븐에 구웠다. 구매해야 하는 재료들을 체크해서 화이트보드에 적었고 설거지도 다 나의 일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2주 정도 후부터는 디저트용 케이크도 만들었는데 사실 나는 로즈마리와 살구 그리고 레몬이 잔뜩 들어가는 이 케이크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큼지막한 살구를 다섯 개 정도 고르고 로즈마리 한 줄기를 칼로 다진다. 로즈마리를 썰기 시작하면 주방에는 허브향이 가득해지는데 그때 살구를 초승달 모양으로 썰어준다. 공기 중에 약간의 달콤한 향이 섞이기 시작하면 큰 레몬을 반으로 잘라서 즙을 낸다. 그다음엔 구름처럼 부푼 흰자와 반죽, 로즈마리, 레몬즙을 섞고 틀에 붓는다. 반죽 위에 노란 살구를 가득 올려주면 끝. 그대로 오븐에 40분 구우면 완성이다. 이 레시피는 이탈리아 레시피였는데 이탈리아에서 여름에 아침으로도 먹는 케이크라고 한다.



레스토랑을 담당하는 케이트는 영국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요리에는 여러 국적 재료가 섞여있었다. 내가 만들던 복숭아 염소치즈 샐러드에는 민트와 오렌지  소스가 들어갔는데 오렌지  워터와 머스터드를 섞어서 만드는 드레싱이었다. 가지 샐러드에는 참깨소스를 갈아서 만든 타히니와 그릭 요거트를 섞은 소스를 올렸다. 그리고 멜론 샐러드에는 쪽파와 자타르를 넣었는데 자타르는 허브와 깨가 섞인 레바논 향신료였다. 셰프는 매일 카포나타를 만들었다. 카포나타는 이탈리아 음식으로 가지, 샐러리, 케이퍼, 건포도에 발사믹 식초와 설탕을 넣고 만든다. 어떻게 보면 프랑스의 라따뚜이와 굉장히 유사해 보이는데   달고 감칠맛이 강했다.

엑상 프로방스의 아침 시장에서는 가끔 꽃을 팔기도 한다


셰프는 가끔 나를 시장으로 심부름 보내곤 했다. 채소를 파는 피에르에게 호박꽃과 로즈마리를 사고 과일을 파는 마리네 노점에서는 프랑보아즈를 샀다. 종이봉투에 담긴 과일들을 품에 안고 거리를 걸을 때면 내가 정말 프랑스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 시장은 시청 앞 광장에서 8시부터 12시까지 열렸는데 상인들은 주로 과일과 채소를 팔았고 가끔 치즈와 생선을 팔기도 했다. 이 아침 시장에서 파는 과일은 모노프리(슈퍼마켓)에서 파는 과일과는 차원이 달랐는데 한 입 만 먹어도 남프랑스의 햇빛과 바람이 느껴지는 꽉 찬 맛이었다. 내가 특히 좋아하던 것은 멜론과 복숭아였는데 쉬는 날 아침에도 과일을 사고 싶어서 일찍 일어날 정도였다. 시장에서 동전 몇 개를 내고 햇빛을 받아 미지근한, 하지만 묵직한 과일 봉투를 받아드는 것은 차가운 냉장고에서 비닐에 싸인 과일을 집어 들고 바코드를 찍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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