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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눌리에 Jun 05. 2021

#14. 전 남친이 우리 동네에 온다_3

프랑스 덕후의 프랑스 살이 이야기

사실 그를 처음 만나기로 한 날, 나는 그다지 예쁜 모습이 아니었다. 발레학원에서 열심히 뛰고 돌아 땀을 흠뻑 흘린 채 머리를 질끈 틀어 올린 상태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별로 기대도 없었고 ‘싫다고 하면 말지 뭐’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남자가 무척이나 멋있었다. ‘설마 저 사람인가?’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블론드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이 남자... 블론드에 예쁜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인사를 할 때부터 유쾌한 분위기에 귀여운 미소가 참 좋았다. 우리는 아르헨티나 바에 갔고 간단한 음식과 맥주를 마셨다. 아마 여기서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친구에게 ‘오늘 만난 남자 엄청 잘생겼어!’라는 카톡을 보냈던 것 같다.


그는 중학교에서 중국어를, 체육관에서는 쿵푸를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취미로는 복싱을 하고 영화 보는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첫 만남부터 그에게 빠졌던 것 같다. 현재 정립된 기본적인 내 이상형은 1. 운동하는 사람 2.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 그리고 솔직히 프랑스에서 내 이상형 0순위는 잘생긴 남자였다(원래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과거의 연애를 돌아보며 이제 프랑스에서는 잘생긴 걸 영순위로 삼겠다고 결심했었다). 종합해보자면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남자를 통틀어 가장 내 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냥 그런 걸 떠나서 그날 서로 어떤 화학작용 비슷한 걸 느낀 것 같다. 보통 캐미라고 하나? 아니 그냥 스파크가 팍 튄 그런 느낌?


2차는 꽤나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였다. 이 도시에 이런 바도 있나 싶을 정도로 클래식하고 꽤나 비싼 장소였다. 처음 간 바보다 테이블이 작아서 우리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의도한 건 아닌데 돌아보니 마치 영화 속 미장센같기도 하다. 사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상당히 설레고 즐거웠다. 중간에 그가 한 농담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고백할 게 있는데 난 애가 있어” 유럽에서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 꽤나 당황하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였는데 그가 “난 애가 25명이야. 우리 반 애들이 25명이거든”이라고 해 엄청 안심하며 웃었다.


칵테일 바를 나와서는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거리를 조금 걸었다. 시간은 이미 꽤나 늦었는데 우리 둘 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 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그가 “사실 이게 내 차야. 서프라이즈”라면서 “우리 집에 가서 맥주 한 잔 할래?”라고 물었다. 한국이었다면 절대 가지 않았겠지만 나는 5초정도 고민한 후에 'Oui(응)'라고 대답했다. 어쩐지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출국 전 한국에서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프랑스에서 모르는 남자가 같이 산책하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나의 질문에(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은 질문이다) 누군가 ‘그 상황이 되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걸? 만약 그 사람이 끌리는 상대라면 그냥 같이 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 끌리지 않는다면 바로 거절할 수 있을 거고’라고 답했었다.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처음 만난 남자의 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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