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눌리에 Jun 06. 2021

#15. 전 남친이 우리 동네에 온다_4

프랑스 덕후의 프랑스 살이 이야기

그의 집은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작은 도시에 있었다. 오래된 듯한 프랑스식 건물의 구불구불한 문양의 철문을 밀고 돌계단을 따라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열쇠를 두 번 돌려 문을 열고 들어가니(프랑스는 아직도 열쇠 세상이다) 조금은 낡은 듯한 소파와 책상, 침대가 있었고 작은 테라스와 아주 큰 창문이 보였다. 불을 켜니 집 안은 따뜻한 빛으로 가득 찼고 우리는 그의 낡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맥주 마시자고 데려왔으면서 정작 집에는 맥주가 없는 게 함정).

함께 음악을 듣다가 소파 옆에서 기타를 발견했다. 그는 기타가 치고 싶어서 기타를 구매해 유튜브를 보며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무언가를 배우려면 무조건 학원을 찾아가는데  독학을 시도하는 프랑스인들이 신기하면서도 대단해 보였다(프랑스에는 학원 문화가 없다). 나는 그에게 기타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번도 여자 앞에서 연주해  적이 없다며 거절하다가도 결국 자신의 유일한 연습곡인 OASIS WONDERWALL 들려주었다. 내가 기타를 배워보고 싶다고 하니 그는 나를 가르쳐주려고 했다. 그의 팔은  어깨에 닿았고 그의 손과 나의 손은 함께 기타줄 위에 머물렀다. 그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마주쳤고 방안은 묘한 긴장감과 설렘으로 가득 찼다. 그는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자고 갈래? 내일 아침에 집에 데려다줄게”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 사람에게 분명 나는 호감이 있고 충분히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과연 첫 만남부터 자고 가라고 하는 남자를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혹시 동양 여자는 쉽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하는 의심에 나는 그만 오늘은 집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후에 그는 조심스럽게 '너도 나한테 관심이 있었으면서 그날 왜 거절한거냐'고 물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엄청 답답해하며 “도대체 동양 여자가 쉽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거야? 솔직히 동양 여자가 훨씬 어려워. 전통적인 문화권이잖아. 나는 어디서도 동양 여자가 쉽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라고 말했다.

우리의 대화 이후에 나도 이 주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는데 나에게 ‘서양 남자들이 동양 여자를 쉽게 생각하니 조심해라’라고 말한 사람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유럽에 살면서 느낀 건 만약 어떤 사람이 동양 여자를 쉽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일 것. 물론 당연히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애초에 ‘어느 나라 여자가 쉽다, 어렵다’라는 생각 자체가 없다. 그래서 백 퍼센트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서양 남자들이 동양 여자를 쉽게 생각한다’는 말은 오히려 우리가 서양사람에게 갖는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이후로는 누군가를 만날 때 ‘내가 동양인이라서 쉽게 생각하면 어떡하지’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버렸다.


다시 그와 나의 러브스토리로 돌아가자면 나는 그날 그에게 ‘사실 내가 렌즈를 착용하고 있는데 렌즈통이 없어서 자고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지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내 친구들은 정말 어이없어했지만 어쨌든 그는 ‘너를 보내는 게 나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너를 존중한다’면서 자정이 넘은 시각에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물론 세 번 정도 다시 물어보긴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매너 있는 태도에 이 사람이 조금 더 좋아졌다.


우리의 첫 데이트 바로 직후에 나는 삼 주간 친구들과 프랑스 여행을 떠났고 한 동안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 그는 매일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여행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밀당 따위를 하지 않는 그와 나였기에(밀당은... 나도 싫어하고 그도 싫어하고) 가끔 셀카를 보내면 그는 '이렇게 예쁜데 내가 어떻게 너를 안 좋아할 수가 있겠냐'는 다소 오글거리는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그리고 직업 특성상 프랑스의 역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서 내가 모르는, 프랑스 도시들의 새로운 이야기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삼 주 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당연하게도 그를 만나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오늘 집에 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뭐하냐'는 답장이 왔고 일정이 없다고 했더니 자기는 수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빨리 끝내보겠다며 시간이 되면 이따가 만나자고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기다리며 밀린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지자 가만히 있기가 어려워서 열심히 고데기로 머리를 말기 시작했다. 머리를 완성하니 또 심심해서 화장도 하고 혼자 프랑스어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들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홉 시 정도가 되자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오늘 만나는 거야?' 그에게 답장이 왔다. '미안해. 일이 아직 안 끝나서 못 볼 것 같아' 괜히 나를 기대하게 한 그가 원망스러워서 짧게 알겠다는 메시지만 보냈다. 그리고 스타일링한 머리가 아까워서 친구에게 연락했고 결국 그날 밤에는 친구와 둘이 와인을 마셨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는데 그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나 오늘은 수업이 없어서 지금 퇴근했어! 시내에 있는데 시간 되면 지금 만날래?' 아니 아침 여덟 시 반에 이런 문자를 보냈다고?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투덜거리며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어디 어제 나를 기다리게 한 만큼 너도 기다려봐라 싶어서 '응 근데 나는 한 시간 정도 후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문자를 보냈다. 물론 진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아무튼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괜찮다며 기다리겠다는 답장이 왔다.


우리 동네 골목은 원래 예쁘지만 그를 만나러 걸어가는 그 길은 더 예뻤다. 나무들은 바람에 따라 춤을 추듯 움직였고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아주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나무들 사이에는 그가 서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14. 전 남친이 우리 동네에 온다_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