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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눌리에 May 31. 2021

#3. 무계획이 계획

프랑스 덕후의 프랑스살이 이야기

다시 생각해봐도 그 시절의 나는 참 용감했다. 어느 도시에 살지, 무엇을 할지 하나도 정하지 않은 채로 캐리어 하나와 비행기표, 기차표 두 장을 가지고 떠났다. 한국에 사는 이십여년동안 나는 늘 미래 계획을 세워야만 했고 스케쥴러를 빡빡하게 채우면서 살았다. 그렇기에 2019년만큼은 흘러가는 대로, 내 마음 가는 대로, 머리보다는 가슴을 따라서 살아보고 싶었다. 나는 나만의 모험을 떠났다.  


사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던 나에게 계획도 없이 다른 나라에 살러 가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내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내 두려움이 무색하게 파리 샤르드골 공항에 도착해서 내 귓가에 프랑스어가 들리고 시내로 가는 RER을 타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설렘만 남았다. 파리의 파란 하늘과 부서지는 햇살, 약간은 촉촉한 공기,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 그 모든 풍경이 나를 설레게 했다. 


파리에 머무는 삼일 동안 별다른 관광은 하지 않았다. 동네를 산책하고 크레페를 먹고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 있다는 작은 성당을 구경하고 쇼콜라 쇼를 마시고 재즈바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친구가 사는 투르(TOURS)라는 도시로 향했다. 기차역에는 일하는 안느 대신 어머니가 마중 나와 계셨다. 짧은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며 친구의 집에 도착했고 조금 있다가 친구가 집에 돌아왔다. 안느는 서울에서 만난 친구이다. 한국으로 여행 왔던 그녀를 만났고 내가 프랑스에 간다고 하니까 꼭 자기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내가 프랑스에 도착한 시기는 노엘(크리스마스) 시즌이었는데 그녀는 나를 만나자마자 나에게 노엘 선물이라며 예쁜 포장지로 싼 선물을 건넸다. 자기는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파티를 두 번이나 간다며 나에게도 더 지내다 가라며 같이 파티를 가자고 했다. 프랑스의 노엘 파티라니… 정말 궁금했고 너무 가고 싶었지만 남프랑스로 내려가는 기차 티켓을 이미 구매해서 변경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노엘 파티를 가지 않은 것은 아직도 내가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다. 아마 프랑스에 3개월 이상 산 나라면 마음 가는 대로 기차표를 취소하고 친구네 파티를 갔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아직 ‘계획’을 털어내지 못했다. 

투르의 크리스마스 트리

친구의 방은 좁고 긴 건물 5층이었는데 창문을 열면 근사한 성당이 보였다. 노엘 장식으로 도시 곳곳에서 건물에 조명을 쏘고 있었는데 밤이 되면 친구 집 앞 성당 벽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생겼다. 우리는 뱅쇼를 마시며 크리스마스 마켓과 도시 곳곳의 노엘 조명을 구경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직접 만드셨다는 푸아그라를 맛보았는데 전에 레스토랑에서 먹어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친구가 알려준 대로 바삭한 브리오슈 토스트에 부드러운 푸아그라를 바르고 소금을 살짝 뿌려서 입에 넣었다. 고소하고 진한 푸아그라의 맛과 달콤한 토스트 그리고 소금의 짭짤한 맛이 어우러져서 단짠단짠에 부드럽고 바삭한 식감이 다 더해진 완벽한 구성이었다. 저녁으로는 관자가 들어간 그라탕과 소스에 졸인 고기요리를 먹고 낮에 시장에서 사온 치즈를 먹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나를 위해 푸아그라 도시락을 싸주었다.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린 역 의자에 앉아 푸아그라가 발라진 토스트를 먹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사치스러운 도시락인지! 푸아그라 도시락과 종이로 포장되어 있는 치즈를 먹고 있으니 내가 마치 프랑스사람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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